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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성 들이닥쳐 “고르비씨…”/소 쿠데타 3일 천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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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성 들이닥쳐 “고르비씨…”/소 쿠데타 3일 천하 드라마

입력
199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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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중 잠옷바람으로 연금/군,한때 의사당 방어망 돌파/“수십만 시위”에 쿠데타 지도부 줄행랑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실패는 3일간,보다 정확하게는 61시간동안 전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편의 숨막히는 드라마였다.

상황은 초침의 움직임 처럼 급박하게 전개됐다. 쿠데타 발생이 처음 알려진 때는 현지시간 19일 새벽 6시30분. 소련 관영 타스통신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유고」와 「야나예프 부통령의 대통령권한 대행취임」을 타전했다.

20분뒤 타스통신은 국가 비상사태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했다』고 보도,보수파의 쿠데타임을 확인했다.

이보다 앞선 18일 하오7시. 크리미아 반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별장과 모스크바 집무실을 연결하는 특별 전화선이 차단됐다. 샤흐나자로프 대통령 보좌관이 마지막 통화를 한지 3시간 후였다. 밤이 지나고 다음날 새벽4시 쿠데타군과 KGB병력이 고르바초프의 별장을 포위했다. 2시간 뒤 잠옷바람으로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고있던 고르바초프는 자신을 「각하」라는 경칭대신 「고르바초프씨」라고 부르는 3명의 장성들에 의해 연금됐다.

쿠데타 지도부가 6개월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병력을 모스크바시 일원에 배치하는 5시간동안 이렇다할 반쿠데타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침묵을 깨고 옐친 러시아공 대통령이 쿠데타 규탄성명을 발표한 때가 19일 정오. 마네츠광장에 하나둘 모여든 개혁지지 시민들은 그들의 구심점을 발견하고 옐친이 있는 러시아공 의사당 건물로 삼삼오오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간만에 군중은 5천으로 늘어났다. 옐친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쿠데타군 탱크의 올라가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 운동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고 모든 반쿠데타 저항세력이 결집하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간 투데타 8인 지도부는 정권장악을 기정사실화 하기위한 조치를 잇달아 취했다. 언론검열과 시위 및 집회 등 정치활동 금지령이 선포됐다. 저항의 거점인 러시아공 의사당쪽으로 쿠데타군의 증원부대가 이동을 개시했다. 기습공격이 가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유혈충돌의 위기가 고조됐다.

이후 상황은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극도의 혼미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쿠데타군이 19일 하오7시부터 발트3국 등 각 공화국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라트비아공의 수도 리가에서 시민 1명이 사망하는 첫 유혈충돌이 발생했다.

쿠데타 2일째인 20일 유혈충돌의 위기가 소련 전역에 확산됐다. 이날 상오 1백80대의 쿠데타군 탱크가 혁명의 도시 레닌그라드로 진입 했다. 소브차크 시장은 옐친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표명하면서 저항을 호소했다. 20만 이상의 시민이 쿠데타 반대시위에 가담했다. 「시민군」도 조직됐다. 레닌그라드는 러시아공 의사당건물에 이은 제2의 저항거점이 됐다.

러시아공 의사당 주변에는 19일밤부터 곧 전투가 벌어질듯한 일촉즉발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었다.

5만여명의 옐친 지지군중이 「인간사슬」을 형성하고 증강된 쿠데타군과 대치했다.

21일 새벽0시30분 쿠데타군이 의사당앞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했다. 저항시민 5명이 숨졌다. 쿠데타 지도부는 20일 모스크바에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세의 반전과 쿠데타 지도부의 내부분열을 나타내는 징후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20일 하오 8인 위원회의 핵심인물인 파블로프 총리가 고혈압을 이유로 공무를 중단했다. 이어 야조프 국방장관,크류츠코프 KGB의장 등이 쿠데타 지도부에서 이탈했다.

레닌그라드에서 20만명이 시위를 벌였다는 보고를 받은 크류츠코프의 전화를 쥔손이 몹시 떨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3일째인 21일 새벽 러시아정교회 총주교인 알렉세이2세는 시민에 발포하는 쿠데타군 병사를 파문에 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상오6시50분 옐친 대통령은 쿠데타 지도부인 비상사태위원회에 즉시 해산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작성했다. 역전의 조짐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동틀무럽부터 모스크바시를 빠져나가는 쿠데타 군병력이 목격됐다.

상오7시 모스크바시관구 군사령부는 모스크바 일원에서 군병력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했다. 이어 공산당 지도부가 보수파의 쿠데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 국방부는 전군에 비상사태 해제명령을 하달했다. 통행금지와 언론검열 조치가 철회됐다.

하오2시30분 옐친 대통령은 마침내 『비상사태 8인위 전원이 모스크바에서 탈출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후 고압적이던 소련 언론의 보도태도가 나긋나긋해지기 시작했다. 하오3시 소련국영 TV 뉴스진행자 발레리·미르노프는 미소띤 표정으로 「쿠데타 실패」를 전했다.

하오5시 연방최고회의는 고르바초프 축출 쿠데타를 「국가범죄」로 규정했다. 하오9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TV를 통해 국가통수권을 장악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2일 새벽 2시15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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