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실패는 보리스·옐친(60)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뭉친 소련민중의 승리였다.반쿠데타 저항운동을 지도한 옐친은 이제 그의 장대한 기골에 걸맞는 정치적 무게와 부피를 지닌 소련의 국가지도자로 부상했다.
쿠데타직후 옐친이 취한 일련의 행동은 이념과 노선을 달리하는 모든 쿠데타 세력을 결집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단호하고 과감했다.
그는 보수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살벌한 상황속에서 주저없이 쿠데타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이에 저항하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전개와 전국적인 총파업을 촉구했다.
그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행동으로 보였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공 의사당앞에 포진한 탱크위에 올라가 지지자들이 투쟁의지를 고취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이후 옐친은 쿠데타 저항세력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셰바르드나제 전 외무장관과 야코블레프 전 공산당 정치국원 그리고 고 안드레이·사하로프 박사의 미망인인 보너여사 등 개혁파 인사들이 속속 옐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옐친은 고도의 전략적 계산으로 자신의 상징적 지도력을 극대화했다. 러시아공 영토내의 모든 중앙정부기관에 대한 통제권을 대통령인 자신이 장악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군과 KGB를 동원하려던 쿠데타 지도부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쿠데타 지도부인 8인 비상사태위원회의 의표를 찌른 옐친의 역포고령이 발표되자 쿠데타 지도부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반쿠데타 저항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됐다.
쿠데타 주도세력이 반쿠데타 저항세력의 정점으로 떠오른 옐친을 제거하지 못한 이유는 옐친이 러시아공 주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옐친을 체포할 경우 예상되는 엄청난 국민적 반발을 쿠데타세력은 감당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옐친의 승리와 쿠데타 세력의 패배는 이제 진실로 소련에 민주주의가 정착했음을 확인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련역사의 새장을 연 옐친은 굴곡심한 정치적 역경을 헤쳐온 대중정치가다. 우랄공대 토목과를 졸업하고 건설현장을 거쳐 56년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권력의 부침속에서 몇차례의 정치적 좌절을 이겨냈다.
또다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큰일을 해낸 옐친이 앞으로 그에게 짐지워질 역사의 책무를 어떻게 처리해 나갈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유현수기자>유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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