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붕괴·군축등 “과시”/내치 “허덕” 보·혁에 협공85년 3월,크렘린의 최고권력 자리에 미하일·고르바초프를 추천한 소련의 노련한 외교가 안드레이·그로미코 전 외무장관은 『동무들 이제 우리는 미소띤 얼굴에 강철 이빨을 지닌 지도자를 갖게됐소』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6년여동안 그가 주도한 변혁의 물결은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은 위대한 이정표를 쌓았다. 그가 「총성없는 제2의 혁명」으로 불렀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의 파장은 「동토 모스크바의 봄」을 피게했고 파문은 전 세계로 파급됐다.
속마음을 잴수 없는 「크렘린 지도자」 「북극곰」의 이미지를 세련된 용모와 날카로운 위트로 탈피한 고르바초프는 이제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로 서방지도자들과 신의를 나누며 인류애·평화공존의 세계를 건설해 나가던 중이었다. 그 대표적 예가 베를린 장벽 붕괴로 극대화된 대립의 냉전구도 탈피와 87년 12월 INF(중거리핵무기) 폐기협정 이었다. 지난달말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START(전력무기감축) 협정은 그의 업적을 극대회 시킨 성과였다.
이런 업적을 바탕으로 고르비는 9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고 세계적 「고르비 매니어」라는 선풍적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구도 잔존지」인 한반도 등 극동지역의 화해무드 조성을 위해 힘을 기울이던 그는 끊임없이 나돌던 실각설의 실제 주인공이 됐다.
소련 최초의 「혁명후 세대」 지도자였던 미하일·세르게예비치·고르바초프는 러시아혁명의 굴절과 한계에 달한 소련의 선택 이었다.
혁명 15년뒤인 1931년 3월2일 러시아공화국내 코카서스산맥 북쪽 스타브로폴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청년기 공산당 청년동맹(콤소몰) 활동을 발판으로 중앙정계에 진출,매번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초고속 증진을 거듭한 실력과 기회선택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실력못지않게 운도 따랐다. 고향인 소련 최대 온천 유양지 스타브로폴당 제1서기가된 그는 이곳을 찾은 유리·안드로포프 국가안보위(KGB) 의장 등 당대 크렘린 최고지도자들과 친교를 나누게돼 모스크바로 입성했다.
두터운 브레즈네프의 신임아래 안드로포프 KGB의장과의 인간적 유대는 안드로포프가 집권하게 되자 농업·경제정책뿐 아니라 당인사·이념문제까지 관장하는 명실공히 2인자 자리로 고르바초프를 올려놓았다.
84년 12월 고르바초프는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렘린의 2인자,최연소 정치국위원인 고르바초프에 쏠린 서방의 관심은 지대했다. 당시 그를 만나본 마거릿·대처 전 영국총리는 『그는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함께 일할만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85년 3월11일 서기장이된 고르바초프는 이후 그녀의 염원을 배신치 않은채 「미스터 다(예스)」 「미스터 나이스맨」의 이미지를 서방에 가꾸어 나갔다. 여기에는 「크렘린의 재키」로 불렸던 부인 라이사여사(59)의 내조도 한몫했다. 모스크바대 동창으로 철학을 전공한 라이사 여사와의 사이에는 무남독녀인 이리나(35)를 두고 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내치는 외치에 비해 화려하지 못했다. 크렘린이 요구한 「강한 이빨」은 70여년 보수의 벽을 깨뜨리는데는 연약했던 모양이다. 그의 개혁중도자세는 급진주의자에게는 「슈퍼차르」로,보수진영에는 「연약한 지도자」로 내비치며 다시한번 몰아친 역사의 반동에 그의 모습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윤석민기자>윤석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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