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동경도 다나시(전무) 시에 사는 재일동포 문태복씨(68)는 누가 찾아온다고만 하면 반갑다. 부인에게 음식장만을 시키고 주위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다고 먹고 살기가 넉넉한 것도,부인의 음식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부인의 한국 음식솜씨래야 맛보다는 형태만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성만은 다한다.이러한 정성과 수선은 찾아오는 손님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 막상 손님은 놀랄지도 모른다. 다만 2차대전후 B C급 전범 대열에 섰고,한일 양국정부의 천덕꾸러기인 자기네 같은 사람을 찾아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마워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마음이 편치 않다.
가능하면 자동차를 손수 운전해 역까지 마중나가 손님을 모셔온다. 이것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만든다.
손님이 아파트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같은 전범인 친구들과 함께 지나간 50년을 돌이킨다. 목소리엔 금방 한이 서린다. 눈엔 이슬이 맺히고.
그래도 요즘은 지난날에 비하면 행복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식민통치를 받은 한국사람이 무슨 전범이냐고 이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이를 아는 사람조차도 『한국 사람이 오죽했으면 일본 사람처럼 전범이 됐겠느냐』고 친일파로 몰아 붙였다. 또 일부는 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떠올려 영국군 포로들을 혹사시키고 죽게한 사람이 당신들이 아니냐는 듯이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2년계약에 직장보장 등이란 일본사람의 꾐에 빠져 1942년 태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의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보내졌던 한국인 3천명중 전쟁후 포로학대죄로 B C급 전범이된 자신들을 가까이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 당시 한국인 포로감시원중 1백48명이 B C급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중 23명은 사형이 집행됐다. 일부는 옥사했고 출소후 자살한 사람도 2명이나 된다. 전범이 된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55년 4월1일 일본에서 연락이 되는 한국인 B C급 전범끼리 모여 『한사람도 낙오되지 말고 함께 나가자』는 뜻에서 동진회를 결성했다. 보상 등의 투쟁도 현재 문씨가 회장을 맡고 있는 이 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투쟁은 보상때문만이 아니다. 사형 당하고 옥사하고 자살한 사람과 자신들의 삶과 명예를 위한 것이지만 고국의 가족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무 죄 없는 고국의 가족들은 전쟁직후 친일파 전범 집안이라고 많은 수모를 당했다. 가족이 산산이 흩어진 집도 있었다.
투쟁은 투쟁일 뿐이었다. 성과가 없었다. 일본정부는 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청구권문제는 전부 해결됐으니 한국 정부에 알아보라고 물리쳤다. 한국정부는 일본을 위해 일하다 전범이 됐으니 일본정부에 하소연하라고 돌려 보냈다. 일본총리 관저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소용 없었다. 완전히 한일 양국정부 사이에 끼어 핑퐁신세가 됐다. 이러기를 30여년,끝없는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봄 문씨 등의 외로운 싸움에 관심을 가진 우쓰미(내해애자·혜천여학원대) 교수 등 일부 일본인들이 동진회를 지원하는 회를 만들었다. 이같은 환경변화에 힘을 얻은 문씨 등은 오는 9월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전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광복 46주년을 보내며 끝없는 전쟁에 보다 굵직한 한 획을 긋고 싶어서다. 다시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평화의 나라」 일본정부의 태도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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