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때 끌려가 5개월간 일군 노리개 생활/“낮에는 탄약운반·밤엔 위안행위” 몸서리쳐일제에 의해 정신대로 끌려가 온갖 치욕을 겪어온 김학순씨(67·서울 종로구 충신동)가 국내 정신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14일 서울 중국 정동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신대 문제협회의(회장 윤정옥)에 찾아와 자신의 한 맺힌 삶을 공개했다.
조국 땅에 살면서 광복이후에도 짓밝힌 몸이 부끄러워 평생동안 조국의 하늘과 이웃들을 떳떳하게 대할수 없었다는 김씨는 설움에 복받친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대의 산증인으로 당당하게 일본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나왔다』고 힘주어 말했다.
41년 봄 17세의 나이에 끌려갔던 김씨는 만주 길림성 출신. 백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 평양에서 편모슬하에 자라다 국민학교를 갓 마친 14세때 양녀로 팔려갔다.
양부는 김씨를 평양기생 권번에서 3년간 교육시킨뒤 중국 북지철벽진의 소대규모 일본군 부대에 정신대로 다시 팔아 넘겼다.
부대앞에 있던 정신대 거처에서는 김씨 등 5명의 한국여성이 일본군의 노리개가 됐다.
김씨는 『위안부는 17∼20세의 어린 여성이었고 거의 모두가 조선인 이었다』며 『낮에는 탄약운반이나 취사요원·세탁부·간호부로 혹사당해야 했고 밤에는 위안행위를 강요 당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감독에게 매를 맞거나 머리채를 잡아채이고 옷이 벗겨진 채로 끌려 다녔다며 『마치 일본군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공중변소와도 같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다』고 몸서리 쳤다.
정신대 생활 4∼5개월쯤하던 김씨는 그곳을 찾아온 행상 조원찬씨(당시 31세)를 만나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조씨의 도움으로 야밤을 틈타 도망친뒤 중국땅을 전전하며 조씨와 함께 살았다.
해방후 광복군을 따라 서울로온 김씨는 6·25직후 남편 조씨와 1남1녀를 모두 사고로 잃고 행상,파출부일을 하며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정신대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만행』이라고 몸서리치는 김씨는 『일본이 정신대의 존재를 부인하는등 책임회피를 계속하면 증인으로 나서 재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월 3만원,쌀 10㎏의 생계보조와 취로사업장의 막노동 등으로 근근이 살아온 김씨는 열흘전 동네 이웃의 권유를 받은뒤 연일 밤을 새우는 고민끝에 협의회 사무실을 찾았다.
정신대문제협의회 윤회장은 『정신대 피해자가 스스로 나서 떳떳이 밝힌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앞으로도 『많은 증인이 나와 대일 배상청구운동이 본격화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남대희기자>남대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