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특징중의 하나는 특정현안의 등장과 소멸 및 그로인한 분위기 반전의 순환주기가 지극히 짧다는 것이다. 역사적 심판이 끝나 무대에서 사라진 줄로 여겨졌던 인물들이 쉽게 다시 등장하고,생각지도 않았던 중대사안이 돌출하였다가 소멸되었는가 싶으면 이내 또다시 살아나곤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런 중대사안 일수록 역사적 필요성이나 국민적 요구 때문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이나 집단의 권력욕에서 발생하고,그래서 떳떳지 못하다보니 정정당당한 규칙이나 공개적 토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밀실에서의 「꾐수」와 「꾐질」에 의해 추진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요즈음처럼 이런 나쁜 특징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때도 드문것 같다.
민자당의 대권 후보문제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내각제 개헌문제만 해도 그렇다.
애시당초 대통령직선제의 수용은 6·29선언의 민주성을 과시하는 핵심적 근간이었다. 3당합당 전후 슬그머니 내각제 의사가 내비쳐지면서 시작된 개헌문제는 벌써 몇차례나 곡예를 부리면서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노태우대통령이 스스로한 몇차례의 해명을 통해 생명력을 상실해 가는것 같았던 이 문제가 지난번 노대통령과 김대중 신민당 총재와의 아리송한 선문답으로 되살아났다.
그 선문답을 대다수 국민들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청와대와 신민당은 늘 그래 왔듯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나섰다. 하도 해명이 잦다보니 국민들이 믿으려 들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대통령의 정치특보가 『양김씨만 찬성하면 내각제는 가능하고 멀지 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적 관측을 밝혔다. 「대통령후보 완전 자유경선」에 관한 언급과 더불어 풀이하면 여러가지 정략적 의도가 담긴 발언이지만,어찌 되었건 대통령특보 스스로가 노대통령과 김총재와의 선문답에 관해,국민들이 지녔던 의혹이 진실에 가깝다는 점을 입증해 준 셈이다. 더욱이 그 발언의 전후 문맥 어디를 보아도 「국민의 의사」는 증발되어 버리고 없다.
개헌문제와 같은 중대사안은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과제해결과 국민적 의사에 부합하는가라는 객관적 관점에서 검토되고 공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야지도자 모두의 태도가 그러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동기가 떳떳하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설득력이 없어서인지 밀실에서 자기들 끼리만의 밀약이나 그 밀약을 유도하기 위한 「꾐수」로 일관하고 있다.
내각제를 선호하는 여권의 지도층은 물론 지금은 내각제를 반대하면서 민주적 자유경선은 기피하려는 세력역시 합당과정에 「꾐수」를 구사한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또 야당총재의 청와대에서의 선문답 역시,광역선거후 점점 좁혀져 가는 입지를 예상한 「꾐질」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지금은 권력구조 개편에 관한 정치지도자들의 「꾐수놀이」가 이미 국민을 향한 「꾐질」의 단계에 들어서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정치불안을 각오하면서 내각제를 죽였다 살렸다 되풀이 함으로써 개헌의 개연성을 만연시키고 국민적 거부감에 면역성을 기르려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형국으로 보아 그러다보면 자칫 또 한차례의 명분없는 정계 재개편과 일대혼란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민초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과연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될지 안될지도 모르겠고 굳이 하라든가 말라든가 또는 어느 제도가 더 좋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분명히 하고,할테면 「꾐수」와 「꾐질」로가 아니라 국민앞에 당당하게 하라는 것이다.
비단 권력구조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권의 후계자 선정문제·야권통합·선거법 개정 등 모두가 다 마찬가지다.
흔히들 내각제 개헌은 정치안정을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국정에 책임을 지고있는 정부·여당은 무엇을 추진하든지간에 우선 3당통합후의 불안정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정치안정을 위한 구국적 결단」이었다는 3당통합이 정치안정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 추진과정과 형태의 비민주성 때문만이 아니다. 통합동기 자체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고 그 나마 통합 주체들간에도 상호 「꾐수」가 작용하였다가 서로 통하지 않게되자 합의가 있었느니 없었느니 시끄러워 졌다. 국가적 차원의 정치안정은 커녕 권위주의시대 못지 않게 유언비어성 추측이 무성하고 당내의 불화와 불안정이 지속되었던것 아닌가. 찾아야할 교훈은 분명하다.
내각제든 선거법 개정이든 그런 것들이 정치안정과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스타일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이상 밀실에서의 「꾐수」와 「꾐질」의 정치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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