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영·김학렬·남덕우씨 강력한 리더십/외자배분·중화학조정등선 “특혜” 시비로/흔들리는 위상… 「남북통합」 새 역할 기대경제기획원이 22일로 창립 30돌을 맞았다.
기획원은 5·16 두달뒤인 지난 61년7월 「국민경제의 부흥개발에 관한 종합계획 수립과 실시에 따르는 관리·조정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발족됐다.
기획원은 6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집행해 세계사에 드문 급속성장을 주도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기획원이 기획기능과 예산편성 기능을 한꺼번에 장악,전체 국가경제 차원에서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최근 소련과 동구 등 계획경제 체제에서 탈피하려는 국가들이 우리나라의 독특한 기관인 기획원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배경도 비슷한 맥락이다.
특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국가의 모든 역량을 경제성장에 집중시킨 장기영(8대) 김학렬(10대) 남덕우(12대) 부총리 등은 우리나라 성장드라이브의 주역이라 할수 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올라설수 있게 된것은 이들 부총리와 기획원이라는 특수한 관료집단의 리더십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획원이 우리 경제성장에 기여한 공로에 못지않게 시행착오의 흔적도 적지않다. 대기업 지원중심의 불균형 성장전략을 채택,외자배분과 중화학투자 조정과정서 특혜시비를 불렀고 결과적으로 부의 편중과 지역·부문간 갈등을 초래하는 등 성장의 대가를 양산한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기획원은 출범과 동시에 경제개발을 위한 외자도입의 공식창구가 돼 저이의 투자재원을 배분하면서 경제운용의 리더십을 장악했다.
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정책금융과 조세감면 시책을 펴나가는 한편 중동건설붐을 타고 중동진출 지원시책을 지휘했다.
80년대 들어서는 만성적인 플레구조를 타개하려고 예산개혁 작업을 벌였고 중화학 투자조정,해운·건설업 합리화 조치 등 고속성장의 후유증 수습에 홍역을 치렀다.
6공 이후에는 토지공개념 금융실명제 등 개혁조치를 입안추진하면서 아무리 합리적인 정책이라도 기득권 계층의 집단반발속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기도 했다.
기획원은 뚜렷한 업무집행 영역없이 물가 부동산 노사문제 대외통상에 이르기까지 각종 주요 경제현안에 간여해왔다. 이러다보니 역대장관중 특히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장기영 김학렬 남덕우 부총리 재임시엔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했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지고 자율화 전문화 국제화가 가속되는 추세속에서 총괄적인 기획조정 부처가 설자리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89년 정부 일각에서 기획원 격하론이 제기된 배경도 정부의 직접적인 경제통제 영역이 점차 축소되는 시대 흐름을 방영한 것이다.
기획원은 인재배출의 산실로도 크게 기여했다. 기획원을 거쳐간 관료중 장관급에 오른 인사는 모두 22명이며 이 가운데 최각규 부총리 조경식 농림수산 이진설 건설 진념 동자부장관 등은 현 경제팀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 기획원은 경제관료를 지망하는 고시 합격자들에게 인기없는 부처로 기피당하고 있다. 직제상 사무관정수 2백52명중 35석이 빈자리로 남아있고 기획원의 꽃이라던 기획국·예산실 조차 4명씩 결원상태를 빚을 정도여서 급격한 위상약화를 반증하고 있다.
경제계 일각에선 『기획원의 역할이 70년대까지 기획,80년대 이후 조정위주였다면 이제 통일을 앞두고 남북 통합사업의 완성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것』이라고 제의하고 있다.
동서독 통합과정에서 보듯 통일과정은 정치외교적 수사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제운용의 문제로 귀착되며 이 과제를 전담하는데 기획원처럼 역량을 갖춘 기관을 찾기가 쉽지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유석기기자>유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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