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조달 개발실에 직접전달역/박순자씨와 접촉 돈받아 가기도”/빚몰려 신자들 데리고 곳곳 도피행각검찰이 오대양과 (주)세모·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의 연결고리로 보고 추적중인 송재화씨(45·여)의 정체와 행적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나 22일까지도 소재확인이 안돼 사망설,납치·감금설,해외도피설 등 갖가지 억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89년 1월 전남 도경에서 사기혐의로 조사를 받을 당시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송씨는 76년 9월부터 권신찬씨(59)가 목사이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231의 23 삼각패션 C동 2층 한국 평신도 복음선교회(구원파의 전신)를 다니기 시작했다.
송씨 등은 당시 교회에서 가끔 설교도 했던 (주)세모의 유병언사장(50·권신찬 목사의 사위)이 사업을 한다는 이유로 『사장님』이라 부르곤 했다.
송씨는 그후 80년초부터 82년 9월까지 강남구 삼성동 상아 아파트 2동 902호에서 미혼녀교인 20여명과 공동생활을 하며 유씨가 일본으로부터 주문받은 기모노에 동양자수를 넣어주며 유씨를 『모시는 사이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구원파 입교전의 행적은 대전 출생으로 여고를 졸업하고 전남 도청에서 근무하며 기독교 장로교 신자였던 것으로만 알려졌다.
82년 11월 구원파 광주교회에 간 송씨는 『남의 빚이라도 내서 교회에 내라. 삼우트레이딩(세모의 전신)이 부도직전에 있으니 회사를 살리자』며 신도들을 상대로 사채를 끌어모아 유씨의 강남구 역삼동 「개발실」 등에 전하는 일을 했다.
송씨는 진술서에서 돈을 모을때 『유사장의 지시』라고 밝혔다고 시인했는데 전달 방법은 직접 봉고차로 현금을 실어나르거나 권목사의 조카인 오모씨의 국민은행 온라인 계좌에 입금한 것으로 돼있다.
당시 피해자들은 송씨가 이밖에도 서울신탁은행 다동지점 유씨의 계좌에 직접 1천만원을 입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송씨는 대전에서 자신과 비슷한 일을 맡고 있었던 박순자씨를 신도들과 함께 찾아가 오대양 시설을 견학하기도 했고 83년 12월10일 S은행 온라인 계좌를 통해 박씨로부터 3천5백60만원을 받아갔다.
송씨는 박순자씨에 대해 『대전교회 신자로서 여러가지 사업을 해 잘알고 있었지만 오대양 사건은 비밀이 많아서 모른다』고 밝히고 있다.
사채의 액수가 커지고 4억8천여만원의 빚독촉에 몰린 신자들이 늘어나자 송씨는 83년말부터 신자들을 경기 안성의 한스농장으로 피신시켰고 자신도 고소 당한뒤 84년 6월 농장으로 들어갔다.
농장에 은신중이던 84년 7월 송씨는 권목사의 둘째 아들 권모씨(46)와 신도들 앞에서 혼인서약을 했으나 『동거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다.
송씨는 이어 85년 9월 강남구 청담동 34의 5 상록수 선교원(일명 태양열주택)으로 옮겼다가 86년부터 여신도 20여명을 데리고 전남 무안·완도 일대를 전전하며 집단 생활하다 87년 8월 오대양 집단변사 사건이 나자 잠적해 버렸다.
채권자들은 평소 박순자씨와 송씨의 관계를 고려,송씨를 오대양 관련 실종자로 신고해놓고 추적한 끝에 88년 12월 완도에서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송씨는 같은해 7월20일 출소했으나 그뒤로 오리무중이다.
오대양 의혹을 수사중인 대전지검은 이같은 송씨의 경력과 활동으로 미루어 송씨가 유사장의 해명과 달리 세모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사채 조달책 이었을 것으로 추정,송씨를 찾고 있다.
송씨가 광주의 조달책이었던 것처럼 박순자씨는 대전 조달책 이었으며 사라진 오대양 사채는 박씨가 세모로 직접 전달했거나 송씨를 통해 빼돌렸다는 것이 채권단의 일관된 주장이다.
따라서 검찰은 송씨를 조사하면 최소한 오대양 사채의 행방과 오대양과 구원파의 종교적 연결관계는 밝혀낼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박씨가 은행 계좌를 사용하지 않아 자금추적을 통한 물증확보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세모·구원파가 오대양의 사채를 빼돌린 배후라면 집단 변사의 원인과 사인을 둘러싼 의혹도 어느정도 밝혀낼수 있으며 김도현씨(38) 등 자수자들이 22일 구원파 신도라고 자백함에 따라 이들의 자수동기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아직은 추리단계인 상태다.<신윤석기자>신윤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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