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장벽붕괴 직후 훼손 보수위해 철거/동독서 없앤 철십자문장·독수리 재등장/“게르만 민족주의 부활” 논란【베를린=강병태특파원】 지난주 초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위에는 독일 역사의 파란과 영욕을 지켜온 「승리의 여신상」이 다시 제자리에 놓여졌다. 네마리의 말이 끄는 로마 시대 2륜 전차위에서 베를린의 중심 파리 광장과 운더덴 린덴대로를 굽어보는 형상의 이 청동여신상은 장벽붕괴 직후인 89년 섣달 그뭄날밤 축제때 환호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훼손돼 보수를 위해 철거 됐었다.
무려 50만마르크를 들여 베를린 교통기술 박물관의 전문가들이 1년반동안이나 복원에 공을 들인 여신상은 정교한 인공부식 처리가돼 2백년의 연륜을 알려주는 푸른 녹 색깔이 그대로 입혀져 있는 등 제모습을 완벽하게 되찾았다.
그러나 전체 무게 5톤의 여신상이 대형 크레인으로 브란덴부르크문 위에 끌어 올려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수천명의 시민들 사이에서는 환호와 함께 항의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항의는 여신상이 한손에 들고 있는 긴 깃대위에 동독 당국이 없애버렸던 프러시아 제국의 상징 철십자문장과 독수리가 다시 등장한 것을 향한 것이었다.
동독의 시민운동 단체 연합체인 「연합 90」은 이 프러시아 제국의 상징물을 다시 복원한 것은 『2백년간 유럽 대륙을 여러 차례 참극으로 몰고갔던 프러시아 게르만 민족주의의 재현』이라고 비난했다.
베를린의 진보지 타게스 슈피겔은 『베를린은 독일 수도라기보다 프러시아 제국 수도로 비친다』고 논평했다.
이 여신상은 올해 건립 2백주년을 맞은 브란데브루크문과 함께 프러시아제국 이래 독일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곡절을 간직하고 있다.
1719년 제국의 심장부에 브란덴부르크문을 세운 프러시아 제국은 이 문을 「평화의문」으로 명명했다. 3년뒤 요한·고트프리트·샤도가 제작한 여신상도 「평화의 여신」으로 불렸다.
그러나 1806년 프러시아를 유린한 나폴레옹은 이 「평화의 여신상」을 통째로 떼어내 파리로 가져갔다. 그후 1814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여신상을 되찾아 온뒤 월계수 잎으로 둘러싼 철십자문장과 독수리를 만들어 붙이고 「승리의 여신상」으로 불렀다. 브란덴부르크문도 이때 「개선문」이 됐다.
그후 비스마르크에 의한 최초의 독일 민족통일과 1차대전의 패배,나치 제3제국의 영광을 지켜보았던 여신상은 2차대전말 베를린 대공습으로 파괴돼 모습을 잃었다.
분단된 동서독이 모두 제 자리를 잡은 지난 58년 서독은 여신상을 원형대로 새로 만들어 브란덴부르크문을 장악하고 있던 동독측에 넘겨줬다.
동독 율브리히트 정권은 「빅토리아」 또는 「나이키」로 불리는 이 독일 민족의 역사적 기념물을 브란덴부르크문 위에 3번째로 다시 올려 놓았다. 그러나 문제의 철십자문장과 독수리는 떼내버렸다. 프러시아와 나치의 군국주의,민족주의 배척을 체제의 최고 이념의 하나로 삼았던 동독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조치였다.
「독일 민족의 영원한 수도」 베를린이 다시 통일 독일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복귀한 지금 이 철십자문장과 독수리가 역사의 유물 창고로부터 재등장한 사건은 독일 정계에도 적지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집권 기민당내 전후세대의 기수격인 하원의원 프뤼거는 『베를린은 프러시아의 수도가 아니다』며 『철십자문장과 독수리는 박물관에나 두고 찬양하라』고 복원작업을 비공개로 진행한 베를린시 당국을 비난했다.
이같은 거센 반발에 대해 베를린시 당국과 고그트만 교통기술 박물관장 등은 『역사는 기념물을 파괴하지 않고 해석함으로써 이해돼야 한다』고 맞섰다. 자민당 소속 크로덴베르크트 하원부의장도 『역사는 지울수 없는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 「역사」를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들이 높다는 사실이다.
기민당의 뵘의원은 『프러시아를 악령시 해서는 안된다』며 프러시아의 독수리는 법과 정의,자유를 향한 노력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상징들을 쳐든 승리의 여신상은 정복자 나폴레옹에 맞선 자유를 위한 투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통일전 좀처럼 듣기 어렵던 이런 목소리들은 브란덴부르크문 위에서 다시 나래짓을 할듯 등장한 독수리와 함께 독일의 새로운 자신감을 대변하는것 처럼 들린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