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정권유지의 「끝내기」 수순/각본·연출 청와대에 조연출역 문공부/총괄 허문도… 실무팀 5인 호텔서 “작업”/발행인 자격등록취소처벌등 독소조항 제시입법회의가 언론기본법 제정과정에서 「배우」 노릇을 했다면 각본을 짜고 연출을 맡았던 쪽은 물론 개혁주도세력,즉 당시의 5공청와대였다. 여기에 5공 7년동안 언론통제의 전위에 서게되는 문공부가 실무적인 기능을 바탕으로 충실한 조연출 역을 담당했다.
5·17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정권유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론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박정희대통령 체제가 무너진 것은 바로 언론장악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도 갖고 있었다. 5·17직후 이뤄진 7∼8월의 기자해직,11월의 언론통폐합 등 신속하고도 단호한 대언론조치는 이러한 신군부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언론기본법은 신군부의 철저한 언론장악 과정중 「끝내기」 순서에 해당된다. 기자해직과 언론통폐합으로 대언론부분에 무소불위의 위세를 과시한 신군부는 제도적으로 언론을 옭아맬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언론기본법은 언론인 해직과 통폐합 등으로 인해 재편된 언론계 질서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뤄졌다』 이광표 당시 문공부장관의 이 증언은 신군부의 언론기본법을 통한 언론장악 의도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언론학살」로 일컬어지는 언론통폐합의 태풍이 막 지나간 80년 11월 중순,서울민사지법에 근무하던 박용상 판사(현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낯선인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청와대 비서실의 이수정이라고 합니다. 언론관계법을 만드는데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법입니까.
기존의 언론관계 법률을 포괄하는 법입니다. 언론발전에 필요한 좋은 제안을 부탁합니다.
좋습니다. 저도 언론법을 공부한 이상 지식을 썩혀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뒤인 11월18일께 시내 P호텔. 청와대 공보비서실의 허문도·이수정 비서관과 문공부의 김동호 기획관리실장·허만일 공보국장 그리고 박용상판사 모두 5명이 모여있다. 언론기본법 제정을 위한 실무대책위원회가 발족하는 자리이다.
김동호씨(현 영화진흥공사 사장)의 증언.
『언론의 전반적인 구조를 규정하는 총괄법을 만들기위해 실무팀이 구성됐다. 구체적인 법안 초작업은 박용상 판사가 마련해온 초안을 토대로 이뤄졌다. 작업은 주로 호텔 등에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실무팀은 P호텔과 O호텔 등을 옮겨다니며 10여차례 모임을 갖고 입법회의에 넘어갈 언론기본법안을 다듬는다.
그러나 실무팀이 구체적인 법조문 성안작업에 들어가기전 청와대와 문공부에서는 언론기본법 제정을 위한 또하나의 사전준비가 이미 상당히 진척됐다. 본지가 입수한 「언론의 육성·창달을 위한 대책」이라는 문공부 작성의 비밀문서는 실무팀구성 이전에 정부의 준비작업이 이미 언론기본법의 골격을 잡는 수준까지 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이 문서의 일부.
「1,목표. 국익우선의 언론풍토 조성.
2,방침.
▲새 헌법의 언론조항에 따라 언론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성을 제고.
▲새 시대 전개에 능동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언론상의 정립.
▲해엄후의 상황을 상정,언론의 자율적 규제의 제도화와 윤리기능의 강화」
자율이라는 허울아래 언론통제를 제도화 하겠다는 신군부의 의도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골격은 이미 마련
이어 이 문서는 「주요골자 및 요지」라는 항목에서 『발행인의 자격·책임요건 강화』 『형사책임 및 처벌요건의 강화』 등 훗날 언론기본법의 독소조항으로 지목되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언론기본법 제정을 위한 이같은 치밀한 사전작업은 당시 청와대에 의해 제기,주도됐음이 관계자들의 증언에서 밝혀지고 있다.
지난 88년말 국회언론청문회에 불려나갔던 이광표씨(전 문공부장관)는 이렇게 증언했다.
『언론통폐합후 청와대에서 법제정의 필요성이 결정됐다. 문공부 입장에서는 주무관서로 실무안을 작성했으나 입법회의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안키로 방침이 결정됨으로써 청와대를 중심으로 법제정을 위한 실무위가 구성됐다』
실무팀의 일원이었던 김동호씨의 증언은 더욱 명확하다. 『실무팀에 참여했을 때는 이미 법의 골격 및 방향에 대한 검토가 끝난 뒤였다.
언론기본법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 곳은 청와대이며 마지막 단계에서 법안조문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한곳도 당시 청와대내에 구성돼있던 법제팀이었다. 실무팀에서 법안기초작업을 할때도 기본방향은 청와대 의견에 따른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문공부에서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주무부서인 공보국이 처음부터 관여했던 것으로 안다』
언론기본법의 초안을 잡았던 박용상 판사도 『실무팀은 나중에 청와대에서도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통폐합을 비롯,개혁 주도세력의 대언론정책을 총괄했던 사람이 허문도씨 였음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언론기본법 제정과정이 공고한 집권기반 구축을 위한 허씨 등 5공 청와대 실세들의 예정된 수순이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언론기본법 제정구상과 비슷한 시기에 청와대가 문공부에 보냈던 「계엄해제후의 언론상황과 언론조정」이라는 제목의 지시문서는 개혁주도 세력들의 5공기간중 대언론정책 방향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낸다.
전두환 대통령의 직접지시인 것으로 알려진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계엄해제후 문공부는 전면에서 효율적이며 강력한 언론조정 기능을 발휘해야하며 이를 위해 중앙정보부의 언론관계 예산과 보안사의 조정기능을 넘겨받도록 할것』
이같은 기본방향에 따라 언론기본법 제정작업에 착수한 5공 청와대는 초기에는 언론에 대해 비상식적인 수준의 제재를 가하려고 의도했었다.
법안실무팀이 가동되기전 청와대와 문공부가 가졌던 구상은 포괄법인 「언론의 육성·창달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기존의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방송법」 등을 개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실무팀의 작업과정에서 이들 법은 모두 언론기본법으로 통합된다.
어쨌든 실무팀 가동전 마련됐던 문공부 작성의 시안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이 시안은 우선 언론인을 선발부터 재교육에 이르기까지 공무원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다음은 그 내용중 일부.
『언론인을 채용할 때는 공개경쟁시험을 통해 종사예정 분야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건전한 판단력을 소지한자를 선발해야 한다』
『언론인을 선발한 뒤에는 채용전 일정기간동안 전문직업교육과 사회적 소양교육을 이수하도록 해야한다』
『언론인의 결격사유는 국가공무원법상의 임용제한규정에 준한다』
웃지못할 이야기다. 더욱 가관인 것은.
『언론인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기관이나 공공단체 등에 취재를 목적으로 장기간 출입할 때에는 사전에 해당기관의 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대언론관이었지만 이같은 생각은 시안으로 문서화돼 당시 관계자들에 배포됐다.
○언론을 정부기관화
이러한 비상식적 내용들은 그후 실무팀의 검토를 거치는 과정에서 많이 삭제되고 완화됐다. 그러나 이같은 입법기도는 5공의 언론정책이 실제로는 언론을 정부기관화하는 철저한 통제방식으로 향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언론기본법 제정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본 Q씨의 증언.
『실무팀은 박용상 판사가 초안한 법안을 갖고 심의를 했지만 당초 문공부 시안에 있던 내용들을 가미시키려 다. 이에대해 박판사는 상당부분 제동을 걸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박판사는 자신이 전공한 독일 언론법에 근거해 정보청구권,취재원에 대한 진술거부권,정정보도청구권 등 언론의 취재활동 보장과 언론에 의한 피해의 구제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음은 박판사의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
『처음에는 이상한 내용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예를들어 언론인자격 부분에서는 금고나 집행유예 등 형사처벌을 받을 경우 언론인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넣으려 했다. 내가 이에대해 자동차 사고 등 과실로 처벌을 받을 경우도 자격제한에 해당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반대의견을 내자 그들은 쉽게 납득하고 결격사유를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한정했다. 아마 그쪽에서는 그같은 법조문이 미칠 부정적 파급효과에 대해선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일부 조항에서는 이처럼 합리적인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언론통제와 관련한 주요조항에 대해서는 실무팀내에서도 상당한 이견이 표출됐다.
당시 시안에는 현재의 방송위원회와 유사한 언론윤리위원회를 구성,이를통해 언론기관을 규제하는 방안이 포함돼있었다. 언론윤리위원회가 모든 언론의 보도 내용을 심의,유리규정에 위배될 경우 권고 또는 경고를 하거나 사과 해명 정정을 해당 언론사에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 내용은 이미 지난 64년 제정된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들어있었으나 언론계의 강력한 반발로 사문화된 것이었다.
○문공부 칼자루 욕심
다시 Q씨의 증언.
『언론윤리위원회 규정을 놓고 박판사와 문공부 관계자들 사이에 다소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당시 박판사는 「그 내용은 기존법에서 이미 사문화적 조항일 뿐더러 민주국가를 지향한다면서 그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곤란하다. 언론에 권리와 의무를 공평하게 주어야지 규제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면서 반대를 했다. 결국 언론윤리위원회 설치안은 삭제됐지만 문공부쪽에서는 이를 끝까지 검토했던 것같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언론기본법 제정은 분명 청와대의 주도로 이뤄졌지만 여기에 편승해 언론기관에 대해 힘의 우위를 차지하려던 문공부의 행정편의적 발상은 대표적 독소조항인 등록취소 등을 언론기본법에 포함시키는데 크게 일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Q씨의 계속된 증언.
『청와대에서 나온 이수정씨 같은 이는 언론계 출신인 때문인지 문공부 관리들보다 언론자유의 측면을 더 강조했다. 이씨는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박판사의 입장에 동조하는 편이었다. 물론 심의과정에서 심각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문공부 사람들은 「이때 칼자루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듯 했다』
당시 청와대에서 언론기본법 제정과정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던 K씨도 같은 증언을 한다.
『법의 내용이 너무 행정편의적으로 돼있다는 지적이 많이 나오게됐다. 결국 지휘는 허문도씨가 했으며 박용상 판사는 학문적 접근을,문공부는 행정편의적 입장을 삽입하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심의과정에서의 논란은 법의 이름에까지 이어진다. 처음 문공부에 의해 「언론의 육성·창달을 위한 법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던 이 법은 실무심의 과정에서 명칭과 내용이 너무 다르다는 지적에 부딪힌다.
K씨의 이에 대한 증언.
『80년 12월초 처음으로 이법의 제정과정에 직접 관여하게됐다. 당시 이 법은 성안이 거의 다 된 상태로 청와대내에서 검토되고 있었다. 그때 이법의 이름은 「언론 창달에 관한 법률」로 돼있었다. 내가 속한 비서팀에서도 이를 놓고 「창달이 아니라 규제일변도인데 이름과 내용이 너무 차이나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 견해가 나왔다. 이러한 의견이 수용된 결과인지는 몰라도 나중에 이름이 언론기본법으로 바뀌게 되었다』
박용상 판사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창달” 아니라 제
『법안이름에 언론창달과 육성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어 다른 이름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냈다. 법의 내용이 그렇지 않은데 이름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솔직하게 「언론기본법」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 법은 80년 12월16일 「언론창달에 관한 법률」로 발의됐다가 며칠뒤 「언론기본법」으로 이름이 변경된다. 12월19일 문공위 회의에서 송지영 위원장의 의견제시 형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5공 정부는 이렇게 마련된 「언론기본법」이라는 제도적 재갈을 모든 언론에 물리고도 이듬해인 81년초 국회구성 등 형식논리적 민주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언론기본법의 긍정적 측면을 홍보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81년 9월3일 뉴설악 관광호텔에서는 이같은 홍보노력의 일환으로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주최의 「언론기본법」 세미나가 열렸다. 전국 모든 신문 방송 통신사의 편집·보도국장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이 세미나에서는 언론기본법 제정에 관여한 청와대 문공부 관계자와 박판사 등이 나와 언론기본법의 제정의미와 구체적 조항에 대해 함께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어느 문공부관리의 발언은 언론기본법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 시각을 엿보게한다. 국보위에 참여한뒤 언론기본법 성안과정에 깊숙히 관여한 이 인사는 『나는 언론기본법 제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 법은 작년 12월 입법회의에서 의원입법 형식으로 제안되었으며 그때 정부측이나 관계기관들의 의견이 참작된 것으로 알고있다』며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자신의 관련사실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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