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무용가로 활동중/화가남편과 상류생활/어머니 가출후 고아원서 성장남노당 부위원장으로 북한 부수상을 지냈다가 총살당한 박헌영의 딸이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박의 딸 박리바안나씨(63)는 서울 출신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박의 첫째 부인어었던 주세죽(1953년 50세로 모스크바에서 폐결핵으로 사망)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현재 소 국립민속무용학교 교수이자 민속무용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화가인 소련인 남편(63)과 모스크바 고급 주택가에서 상류생활을 하고 있다.
중앙일보 보도로 생존사실이 알려진 리바안나씨는 46년 7월 모스크바,49년 여름 평양에서 박헌영을 두차례 만났으며 46년 5월 서울로부터,46년 10월 평양으로부터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리바안나씨는 1928년 초겨울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안에서 태어났다.
박헌영은 허정숙(전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지난 6월5일 사망)의 소개로 주세죽과 결혼,부부가 함께 모스크바 유학을 가던 길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박의 가족은 방한칸을 얻어 살림을 꾸리고 박은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입학,학업에 전념하던중 3년이 지난 31년 봄 주세영이 서울에서 온 박의 동료와 눈이 맞아 가출해 파탄을 맞았다.
그해 가을 박은 중국 등지에서 온 혁명가 자녀들을 보육하는 고아원에 리바안나씨를 맡기고 상해를 경유,서울에 잠입했다.
고아원에서 자란 리바안나씨는 무용재능이 뛰어나 15세때 국립모이세예프 민속무용학교에 입학,소련민족 무용협주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의 편지를 처음받은 것은 이 학교 3학년으로 18세때이던 46년 5월 서울에서 보낸 것으로 겉봉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이라고 씌어있었다.
박은 이 편지에서 안부를 물은 뒤 서울에 오고 싶으면 사진과 함께 답장을 보내라고 당부했다. 리바안나씨는 곧바로 자신의 사진을 동봉한 답장을 보냈고 같은해 7월 모스크바에 온 아버지를 만나 3일동안 함께 지냈다.
헤어질때 박헌영은 평양에 가서 초청장을 보낼테니 꼭 들어오라는 약속을 했는데 2년여동안 소식이 없다 46년 10월 월북해 48년봄 평양에서 두번째 편지를 보냈다.
「내년 여름에 평양에 오라」는 내용이었다.
리바안나씨는 약속대로 49년 8월14일 평양으로가 당시 부수상겸 외상이던 아버지를 두번째로 만났는데 박은 재혼을 해 두살난 딸을 두고 있었다.
평양에서 한달여동안 지내면서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조선민족무용을 배우고 김일성 집에도 찾아가 김정일 등 가족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리바안나씨는 아버지가 평양에서 함께 살자고 권했으나 무용공부를 중단할 수 없다며 거절해 헤어진후 소식이 끊겼다. 이후 52년 출산을 위해 모스크바에온 새어머니로부터 「박해당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53년 12월 아버지가 반국가·반당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을 신문보도를 통해 알았다.
리바안나씨는 아버지의 재판소식을 안뒤 며칠후 지방공연을 다녀와 22년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어머니 주세죽이 시베리아에서 박의 체포소식을 알고 자신을 찾아 오던 중 혹한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회돼 숨졌다는 전보를 받았다.
박헌영이 56년 8월 총살당한 것을 68년 불가리아 공연때 북한대사관 직원으로부터 들었다.
미국·영국·일본·프랑스·동독 등에서 특별공연을 하기도 한 리바안나씨는 『88서울올림픽때 텔레비전으로 소련과 한국의 경기를 지켜봤다』며 『조국의 모습과 아버지의 고향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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