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인간형은 실현 불가능”/“지적아집 벗고 역사변혁 인정을/통일위해선 서로 장점 수용해야”/우리사회 병폐많지만 레닌·김일성식 해결은 시대착오「우상와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등 몇권의 저서를 통해 「70년대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의식화의 원흉」 등의 평가를 받아온 이영희 교수(한양대 신방과)가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지적 고민과 갈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화제가 되고 있다. 어둡던 한 시대 반공냉전논리에 갇혀있던 젊은이들에게 의식해방의 한 돌파구를 제공하고,사회주의적 삶의 이상을 말해온 그는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겪으며 『이미 객관적 검증으로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마침 6·25전쟁 41주년에 즈음한때에 이교수를 만나 「사회주의의 붕괴와 오늘의 우리사회」에 관해 들어본다.
▶선생님은 70년대 일부 운동권 학생들로부터 「사상적 은사」로 불렸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들의 「은사」가 되고자 한적은 없으나 어떤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내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꿨다고 말하는 젊인이들을 나는 감옥안에서,또 밖에서 많이 만났던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의 책들은 역사의 구체적 진전방향을 예측하지는 못했고,단지 이성에 반하는 우상의 파괴나 사회정의에 대한 원론적 제시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인 집단의 환경예측능력 상실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의 1급 지성인,사상가,이론가들도 오늘의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전환시대의 논리」 등에서 말하고자 했던것은 휴머니즘이었지 마르크스나 레닌주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영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레닌이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된것까지 내 책임이냐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앞에서 지적 갈등을 겪고있고,지적 오류와 단견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좀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객관적 검증으로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하려는 것은 지식인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사회주의는 왜 몰락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소유욕은 인간의 근본속성
『소련에서 80여년,중국에서 50여년,동구에서 50여년이나 사회주의를 했는데도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들어가자마자 소위 사회주의적 인간형이 어이없게 무너지는 것을 보니 놀랍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속성이라는 것이었지요. 사회주의가 사실은 불가능한 상태까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을 만들려했고,만들수 있다고 생각했고,만들었다고 주장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사회주의 국가현실에 대해 환상을 가졌던 것은 인식부족뿐 아니라 반정부·반체제의 감정적 요소가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유나 가치평가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다면 상대에 대한 인식부족도 있었겠지만 우리사회에 너무 많은 부정적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합니다. 건국이후 40여년간 쌓여온 부정적 요소들은 말할것도 없고,1인당 국민소득 5천달러를 외치는 오늘도 돈 3천원 진찰료가 없어 병원에 못가는 이들이 있고,밤늦은 시간에는 응급치료가 거부되기도 합니다. 병원같은 문명의 이기들도 사유재산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신숭배,부도덕,가진자 위주의 지배체제 등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사회주의에서 미래를 발견하려는 욕구들이 싹텄던 그동안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독일통일로 크게 고무됐던 우리나라의 통일열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라앉아 오히려 통독이전보다 더 냉정해지고 있습니다. 통일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독일이 아니구나 라고 많은 사람들이 뒤늦게라도 깨달았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우익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독일식 통일,좌익이 주장하는 혁명적 통일은 다 틀린말입니다. 우리의 통합은 쌍방이 지닌 장점을 서로 받아들여 각기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합니다.
그런 발전없이는 통일이 될수도 없지만,되더라도 내란이나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남한주민이 북한 주도의 통합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물론 결사반대 할것입니다. 북한주민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독일수준까진 20년 걸려
통합하되 어떤 통합이냐는 질적인 문제와 시간소요의 문제를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남북한 정부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노력을 쏟는다해도 우리가 동서독 수준까지 가려면 20년은 걸릴것입니다. 통일전의 동서독은 이미 사회·정치적 존재양식에서 폭넓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으나,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남한과 북한의 장점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입니까.
『남북한의 현실에서 반드시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상호간에 이런 점들을 수용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우선 북으로부터 민족자주성,민족적 긍지,평등성과 사회주의적 정책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북은 남으로부터 개인의 권리와 자유,기회추구의 확대,시장경제의 장점 등을 받아들여 김일성 유일사상과 경제적 낙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재 남에는 좌측의 견제·도전세력이 없고,북에는 우측의 견제·도전세력이 없는데,이런 상황에서 건전한 사상과 제도의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
▶선생님을 비판하는 일부 운동권 젊은이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선배란 늘 후배들의 비판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존재이므로 그들의 비판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레닌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나를 공격한다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적·사상적 아집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완전한 치유책이라는 구조결정론은 시정돼야 합니다. 사회주의가 모든것을 치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미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80년,50년 사회주의를 실험한 본인들이 실패했다고 하는데,서울에서 책 몇권 읽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긴다는 것은 얼마나 비과학적인 태도입니까. 우리는 교조적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한다는 사회주의적 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구조결정론은 시정돼야
▶왜 아직도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 위력을 갖는다고 보십니까.
『역사적 특징으로 볼때 학생운동은 이 사회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하고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은 단순대응적이 아닌 자체논리와 운동경향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도 현상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강하고,북한의 사상·철학·정책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남한문제의 해결방식으로 북한식 시각을 갖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레닌적,김일성적 사고방식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것이고 남한사회는 계급혁명이 가능한 상황조건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것은 우리사회에 투쟁에 의한 개혁의 대상이 될만한 많은 질병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이제 자본주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본주의적 사상과 제도가 완전히 승리했다,이제 투쟁의 역사는 끝났다,이런 식의 견해는 잘못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관과 정책으로 수정·제거·상쇄돼야할 많은 결점과 부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무기를 들고 싸워야할 적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나,그렇다고 해서 자기검증을 하지않은채 미래는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인류를 위해 크게 불행한 사태가 올것입니다. 이제 자본주의는 일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느긋하게 자기체질을 바꿔나가는 노력을 해야할 때입니다. 사회주의가 바뀐만큼 자본주의도 바뀌어야할 역사적 단계에 와있다고 봅니다』
▶2년반전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나의 노선은 중도좌」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같습니까.
○나의 노선은 사회민주주의
『그렇습니다. 중도좌를 다른말로 하면 사회민주주의인데,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니는 필연적 결과로서의 인간소외와 무제한적 이윤추구 경쟁으로 인한 부패·타락·범죄 등을 치유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철학적 부분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난국을 풀기위에 정부와 운동권에 하고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운동권은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목표달성의 시간단위를 좀 연장하는 사회인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6공은 일단 투표에 의해 수립된 정권인만큼 정책부문의 비민주성은 부인할지언정 그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운동권의 행동방식은 보다 유연해져야 합니다.
정부에 하고싶은 말은 국가 및 사회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끊임없이 운동의 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필요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세력에 국가권력을 총동원해서 대응하는 것은 미숙하고 치졸한 짓입니다.
국가의 제반역량이 여러측면에서 대단해졌는데도 운동권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될뿐 아니라 국민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 그동안은 몰라서 두려워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진정 우월한 사회로 가려면 국가보안법적 사고방식과 정치행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대담 장명수 편집국차장>대담>
<약력>약력>
▲1929년 평북 운산에서 출생
▲50년 국립해양대 졸업
▲57∼71년 합동통신·조선일보기자
▲72년 한양대 신방과 교수. 두차례 해직후 복직
▲반공법 위반으로 세차례 옥고를 치름
▲「우상과 이성」 「전환시대의 논리」 「분단을 넘어서」 「8억인과의 대화」 「역정」 등 저서와 역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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