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은 4·19,5·16,5·18 등과 함께 우리 현대사회 소용돌이속에 묵직하게 각인돼 있는 날이다.6공을 살고있는 모든 이들은 지난 87년 6월 항쟁의 정점이었던 「6·10 국민대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독재타도』 『민주쟁취』를 외치는 학생 시민들의 민주화열기는 끝내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고,6공 정부는 늘 6·10의 교훈을 의식하며 운신해온게 사실이다.
학생·재야는 그후 해마다 6월10일이면 대규모 집회를 열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새로운 이슈를 제기해왔다.
88년엔 전대협 학생 1만여명이 연세대에 모여 「6·10 남북청년학생회담 출정식」을 갖고 판문점으로 향하다 경찰과 충돌하는 등 온나라를 통일열기에 몰아넣었다.
89년에는 문익환 목사의 방북과 부산 동의대사태 등의 여파로 공안합수부의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도 연세대에서 2천여명이 모여 「6·10 민주항쟁계승 및 평양축전 참가를 위한 결의대회」가 열렸다.
또 90년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2천여명이 성균관대에서 「민족 민주열사 합동추모제 및 6월항쟁 계승 국민결의대회」를 갖고 재야가 주장하는 1백30여 「열사」들의 영정앞에서 한풀이마당을 펼쳤었다.
그 「6·10」이 금년엔 조용히 지나갔다.
강경대군의 죽음에 이은 잇단 분신·시위사태와 김귀정양 장례문제가 겹쳐 당연히 예상됐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없었다.
범국민 대책회의는 『애초에 확정된 일정이 아니었고 8일 범국민대회에 6·10대회를 포함했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외대사태 등으로 국민적 시위열기가 가라앉은데다 국민회의로의 재편 및 성당 철수문제 논의 등 내부문제로 6·10을 그냥 넘기기로 한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대책회의도 국민의 지지와 참여가 있어야만 투쟁도 가능하다는 6·10의 교훈을 받아들인 셈이다.
그러나 정부도 시위없는 6·10을 좋아할 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6·10의 교훈을 망각해온데서 시국사태가 달포를 넘게 이어진 것은 아닌가 조용히 반성한 하루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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