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엔의 성가가 제법 높아졌다. 걸프전이래 유엔의 평화유지·회복기능이 새삼 재평가 받고 있는 탓이다. 이에 따라 유엔의 권능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유엔 개편안이 나오고 있다. 그중이 한 흐름이 유엔 사무총장에 실력자를 앉히자는 제안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4월27일자)는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외상을 후보로 꼽았다. 카터 전 미국대통령도 이름이 오르내린다. 더 기발하기는 뉴욕타임스(3월21일자)의 한 칼럼니스트가 제안한 트로이카 총장제. 그는 그 후보로 셰바르드나제,아유브·칸 전 파키스탄 외상,대처 전 영국수상을 지명했다. 국제정치의 실세를 총장자리에 모셔,유엔의 권능을 더욱 실효있게 하자는 제안들이다.이런 가운데,그래와서 PKO(Peace Keeping Operation=평화유지활동)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쉽게 말하면,다국적 평화유지군이다. 청베레·청헬멧으로 알려진 PKO는 56년이래 지금까지 20차례 파견됐고,77개국 연 50만명이 이에 참가했다. 그사이 7백여명의 희생자를 내기도한 이들의 평가는 88년 노벨평화상이 주어질만큼 높다. 이로써,유엔의 평화유지·회복기능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를 짐작할만도 한데,스웨덴 등 북유럽 4국은 정규군에 PKO 부대를 따로 두고 있으며 일본은 이를 빌미로,자위대의 해외파병을 가능케할 입법을 추진중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유엔에 들어가면 당연히 PKO에 협력할 의무를 지게 된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언젠가 남과 북의 젊은 병사들이,같은 청베레 차림으로,나란히 분쟁지역 보초를 설날이 올지도 모른다. 남과 북이 합의해서,이땅 휴전선에 다국적 청베레를 배치할 날이올지도 모른다.이런것이 가능할까 싶은것이 현실이지만,적어도 그 가능성은 있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이처럼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런만큼 북한의 유엔가입 선언은 대서특필감이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은 너무 성급하고 호들갑스럽다. 당장에 쏟아진 남북 정상회담,대통령의 유엔 재연설,무슨 상설협의체에 상설대표부,유엔군 해체에 평화협정·기본협정 등등… 마치 무슨 탈춤이라도 추는것 같다. 이래도 되는것일가.
그에대한 해답은 북한 외교부성명에 다 들어있다.
성명은 북한이 「유엔헌장을 시종일관 존중해」왔음을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앞으로는 어떨까.
성명은 유엔 동시가입을 극복되어야할 「비정상적인 상태」,남한측의 「천추에 용서못할 대죄」로 규정하고,「앞으로도 변함없이 하나의 국호… 하나의 의석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하나의 조선」,단일의석가입 주장에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조선」을 관철하기 위해 불가피 유엔에 가입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적어도 그들이,「하나의 조선」을 대외와 대내,대남의 다중기준으로 적용하며,유엔무대에서 의석 단일화시비를 끊임없이 걸어올것은 틀림없다. 덩달아 단일의석가입에 동조해오다가 겸연쩍어진 국내 일부세력이,이번에는 의석단일화에 매달릴 것도 예상할 수가 있다.
성명은 또 「각계각층 인민들과 재야세력들」의 투쟁에 언급하고 있다. 유엔 동시가입이라는 「새롭게 조성된 난국은 온 민족의 단결된 힘과 막을 수 없는 통일열망에 의하여 반드시 극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재야세력들」의 힘을 잘못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조선 정세로 하여(중단된 고위급회담이) 언제 재개될지도 알수 없는 형편」이란 문귀도 마찬가지다. 이런 오판을 하고 있는한,북한의 대남 혁명전략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분명 변화의 가능성과 현실적 변화는 다르다. 가능성의 추측만으로 들뜰 것은 없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 변화의 추이를 찬찬히 살피고,빈틈없이 예비하면 그만이다.
그중에서도 아쉬운 것은,우리의 유엔가입이,이제는 새삼스러운 남·북 정통성 싸움의 성과가 아니라,국제정치의 한 주역으로서 의당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유엔가입은 대북정책의 일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며,유엔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닌 것이다.
다음은 대북졸속주의의 지양이다. 지금 당장 북한의 의중을 촌탁하느라 안달할것은 없다. 우리가 7월 재개를 제안해놓고 있는 고위급회담의 향방에서,북한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저절로 밝혀진다. 또 북한의 외교부 성명문을 읽어 볼때,저들의 결정 역시 다급했던듯하고,그래서 저들대로의 논리를 정립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그 결과는 북한의 유엔가입신청 직전쯤의 새로운 제안으로 나올수도 있다. 기다려서 늦을것은 없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우리가 미리부터 확실하게 해둘 것은,유엔을 무대로한 남과 북의 소모적인 경쟁은 되풀이 않는다는 다짐이다. 결과적으로 말한다면,정원식 전 장관 등 지난달 정부가 파견했던 유엔대책특사들도 낭비적인데가 있는 것이지만,유엔무대에서의 남·북대결은 국가자원의 낭비를 가져올 뿐아니라,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수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 재연설이 꼭 있어야할지도 의문이다.
더하여,가장 중요한 것은,변화의 가능성을 눈 앞에 둔 이 시점을,우리 통일정책 재정비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다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며,그리하여 여·야,가능하면 재야까지를 포함한 합의를 끌어낼 수가 있기를 바란다. 6공 혼란의 시초와 가장 큰 원인이,사실은 정부의 느닷없는 통일정책과 어줍잖은 그 집행에 있었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의 의의는 엄청나다. 그러나 이 변화가 우리측의 재정비를 요구하고 있음에,먼저 생각이 미처야 한다. 5월의 지루한 소용돌이를 겪고,북한의 유엔정책변화에 보는 지금은,들뜰 때가 아니라,오히려 심사할 때일 것같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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