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개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정경희(아침 조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개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정경희(아침 조망)

입력
1991.05.28 00:00
0 0

○영국사람들의 논쟁방독면을 쓰고 한쪽 손에 방패,또 한손에 방망이를 든 전투경찰의 대열은 마치 2천년전 로마군단의 모습이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준다. 지난 25일 하오 다섯·여섯시 무렵 서울의 퇴계로는 마치 싸움터와도 같았다.

그 넓은 한길에 키가 구척같고 건장한 젊은 이들이 한줄로 딱 버티고 길을 가로질러 서있었다. 발밑에는 화염병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한쪽에서는 대여섯명의 젊은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뿌린 전단들이 널려 있고,아스팔트 위에는 스프레이로 구호가 씌어 있었다. 한떼의 젊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가는가 하면,마치 로마군단같은 전투경찰대가 이동하는 모습도 보였다.

억수같다고는 할수없어도,초여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거리에 깃발과 구호와 로마군단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고 밀리는 현장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현장이다.

문득 21년전 영국에서 런던대학생들과 입씨름을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70년은 유럽에서 과격한 대학생 데모대가 천지를 뒤덮고 있을때였다. 런던 대학생은 그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체제비판운동의 중심세력이었다.

수염텁석부리 학생들은 대뜸 질문을 던졌다. 『왜 한국은 남의 나라에 내정간섭을 하는가?』­한국군의 월남 참전을 따지는 것이었다. 서투른 영어로 약 30분 월남파병의 배경을 둘러싸고 입씨름을 했다.

30분의 논쟁은 뜻밖의 체험이었다. 첫째 이들은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다. 또 서로 의견이 엇갈려도 자기의견을 조용조용히 말하는 것으로 언쟁은 끝났다. 말하자면 영국사람의 논쟁은 그런 것이다.

○여론에 밀려 개각

5공화국때 핍박받다, 6공화국의 스타로 복귀했던 한 교수님이 최근 사표를 내던져 세상의 화제가 됐었다. 강경대군을 비판했다가,운동권 학생이 그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자 사표를 내던진 것이다.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존경과 인기를 누리는 교수님이 교육에 「환멸을 느꼈다』며 강의실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교육이 젊은이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이라면,사표를 던질것이 아니라 그 학생들과 끝까지 입씨름을 했어야하지 않았을까? 그의 심정을 알수있을것 같으면서도,비판을 용납하기 싫어하는 나 자신의 얼굴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같아 아쉽다. 토론은 반드시 삿대질로 끝내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다.

하기야 정부는 노재봉 총리의 사표를 받고,4부장관은 바꾼 것을 가리켜 국민의 비판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물론 『할만큼 했다』던 정부가 개각을 했으니 비판하는 쪽의 압력을 받아들인 것은 틀림없다. 그런 뜻에서 이번 개각은 노태우 대통령정부 출범이래 가장 큰사건임에 틀림없다.

한쪽에서는 장관이나 총리를 소모품처럼 갈아치운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번 개각은 그동안의 개각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그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장관이 뒤바뀐 것은 대개 정부쪽 사정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렇기때문에 사람이 바뀌었다고 세상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번 개각은 『안나가겠다』던 사람이 여론의 압력에 등을 밀렸다는데에 큰 뜻이 있다.

○꼭 해야될 세가지

그러나 개각의 내용은 여론이 바라던 것과는 반대쪽으로 나타난것 같다. 타협과 토론으로 「정치」를 복원하려 했다면 좀더 다른 사람들을 찾았어야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기때문이다. 정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 구성으로 봐 짐작이 간다.

하지만 총리로 지명된 정원식씨는 『나는 강성이 아니니 두고 봐달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국민이 그의 말을 믿는다기 보다는 『두고 보자』는 쪽일것이다.

임기 1년9개월을 남긴 정부가 해야될 일은 약속했던 개혁을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땅을 가진 자와 그렇지못한 자의 빈부구조를 바로 잡고,강경대군의 죽음을 부른 사립대학 운영의 공개와 공공성 확보,그리고 경찰의 독립·중립화는 반드시 해야될 일이다. 개각의 최종적 평가는 그때 다시 할수있을 것이다.

당장 「정권타도」를 외치는 구호는 첫째 현실성이 없다. 막무가내 강경데모는 흡사 「아기를 낳지못하는 미녀」와도 같다. 정말 아기라는 기적을 낳고 싶다면 유권자를 설득하고 계몽하는 일에 그 펄펄 넘치는 에너지를 쏟는게 보다 생산적인 것이다.

「5당4락」­광역 지방자치선거에서 5억을 뿌리면 당선된다는 얘기다. 돈 봉투받고 표찍어주는 썩고 어리석은 주권자들이 있는한 아무리 정당한 구호도 헛구호로 그칠 것이다. 그 현실을 외면하고 데모에만 집착한다면 좋게 말해서 「엘리트주의」요,듣기에 거북스럽겠지만 「영웅주의」라고 할수밖에 없다.

물론 「힘」을 쥔 정부가 먼저 감았던 눈을 뜨고,막았던 귀를 열어 대화와 타협에 응해야 할것이다.<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