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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함께 넘어지며 깔려/퇴계로서/숨진 성대 김귀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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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함께 넘어지며 깔려/퇴계로서/숨진 성대 김귀정양

입력
1991.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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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서 경찰포위망 피하려다/“경찰 퇴로막고 사과탄 협공” 목격자들 주장성균관대 김귀정양(25) 압사사건은 25일 하오 3차국민대회가 원천봉쇄된뒤 중구 퇴계로4가 일대에서 시위대 1만여명과 경찰이 대치,최루탄과 돌·화염병으로 격렬한 공방을 벌이던중 발생한 불상사였다.

사고순간을 목격한 김지훈군(21·공주대 국민윤리교육 4) 등에 의하면 이날 하오5시30분께 경찰이 퇴계로3가와 6가 양방향에서 다연발최루탄을 난사하며 포위해 들어오자 대한극장 맞은편 신성상가옆 폭2m가량의 식당골목으로 시위학생들이 한꺼번에 대피하던중 골목입구에 세워진 승용차에 걸려 20여명이 잇따라 넘어졌다.

그뒤 경찰사복 체포조가 쫓아와 경찰봉을 휘두르고 사과탄을 던져 강제 해산시킨뒤 맨밑에서 의식을 잃은채 깔려있던 김양이 발견됐다. 김양은 인근 학생들과 취재기자에 의해 취재차량편으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병원측은 『도착 당시 이미 숨진 상태였으며 무릎에 피멍과 입술부위에 상처가 있었을뿐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고 밝혔다.

김양이 영안실로 옮겨진 직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학생 1천여명이 병원정문에 가정용 LP가스통 3개·고압산소통 4개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인근에서 격렬한 시위를 계속했으며 응급실 입구도 40여명이 봉쇄,보도진의 접근을 막았다.

한편 김양이 변을 당한 장소에서 서강대생 채수진양(20·국문 3)이 경찰이 던진 사과탄 파편에 맞아 목오른쪽 부분이 5㎝가량 찢어지는 상처를 입고 을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목격자들은 『경찰이 퇴로도 열어놓지 않고 협공해 혼란이 시작됐다』며 『경찰이 쓰러진 시위대에 사과탄을 던지고 경찰봉을 휘두르는 등 거칠게 진압하는 바람에 부상자가 속출했다』고 말했다.

사고현장은 서울시경 제4기동대가 진압작전을 펴고 있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하오8시께 백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강경대군 죽음과 권창수씨 폭력만행 사건에 이어 이번 김양의 죽음은 경찰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과잉진압으로 인해 발생한것』이라고 비난하고 26일 하오7시 규탄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숨진 김양은 경기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출신으로 85년 서울 무학여고를 졸업한뒤 88년 성균관대에 입학,심산 김창숙선생의 사상을 연구하는 「심산연구회」 서클에 가입해 활동해 왔다.

김양은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집에서 어머니 김종분씨(53·노점상)와 언니(27) 남동생(19)과 함께 어렵게 살아왔으며 아버지 김목배씨는 89년 사망했다.

김양은 고교를 졸업한해 한국외국어대 용인 캠퍼스 불어과에 입학했다가 학비 마련이 어려워 1년만에 자퇴했고 성대입학후에도 1년간 가정사정으로 휴학했었다.

김양의 서클동료들은 『귀정이가 서클가입후 학생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으며 지난해에는 동아리연합회 총무부장을 맡았었다』고 말했다. 김양은 낙서노트에 『우리의 운동은 어떠한것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같은 신념으로 이루어져한다고』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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