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책임에 「방패용·강성·의전형」평/정치상황 악화땐 “표적”… 「속죄양」역도/건국후 30명 자리바꿈… 정일권씨 최장기록국무총리는 어떤자리인가. 최근의 위기정국 수습방안으로 총리 퇴진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새삼 총리의 위상과 역할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초대총리 이범석이래 22대의 걸쳐 서리를 포함해 모두 30명이 총리자리를 거쳐갔다. 헌법상 총리는 대통령 다음가는 정부 제2인자로 규정돼 있으나 명과 실이 상부한 경우는 그리 흔지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 한사람에게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는 대통령중심제의 권력구조 때문이다. 대통령제하의 「실력자」는 대통령의 신임도 내지는 지근여부에 따라 결정돼 버린다. 총리라는 자리가 법적 서열만큼 실질적 권한을 담보하고 있지못한 관계로 상황과 사람에 따라 어떤때는 속죄양으로 소진되기도 했고 때로는 묵직한 권한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역대 총리들에게는 「의전·대독형」 「방패용」에서부터 「실세」 「강성」에 이르기까지 「방패용」에서부터 「실세」 「강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별칭이 뒤따라 다녔다. 여하간 대통령제하에서 총리제를 도입한것 자체가 건국초 극심했던 정파간 이해다툼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 총리의 바람직한 모델을 재정립하자는 견해가 정부내에서도 적지 않다.
▷파란의 출발◁
우리나라에 국무총리제가 도입하게 된것은 건국초 한민당과 이승만 박사의 정략적 절충에 의해서였다. 현행 국무총리제가 갖는 어정쩡한 정치절충에 의한 기형적인 제도도입에 연유한 바 크지 않나 싶다.
48년 「5·10선거」에서 참패했으나 무소속의원을 포섭,원내다수세력을 확보한 한민당은 건국헌법을 놓고 내각제와 대통령제 사이에서 고심하다 내각제를 채택키로 한다. 한민당은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가 확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를 국가원수로 옹립하고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내각제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러나 노회한 이박사가 한민당의 「뻔한수」를 모를리없어 『실권없는 형식적 국가원수 자리엔 취임하지 않겠다』고 거부한다.
한민당은 이박사의 국민적 인기를 과소평가할 수 없어 대통령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대신 의원내각제적 요소인 국무총리제를 건국헌법에 포함시켜 대통령이승만·내각한민당이라는 절충구도를 창출한다는 배수진을 친다.
한민당의 도움으로 권좌에 오른 이대통령은 한민당의 기대와는 달리 김성수씨(한민당 위원장)대신 조선민주당의 이윤영씨를 총리서리로 임명,국회인준을 요청한다.
이에 격분한 한민당의 반격으로 이서리의 국회인준안이 부결되자 이대통령은 당시로서는 정치세력을 형성치않고 있던 이범석씨를 서리로 지명한다.
이총리서는 대국회 로비에 나서 조각시 한민당에 8자리의 장관 자리를 할애한다는 묵계를 제시,국회인준을 얻어내나 이 약속은 이대통령에 의해 백지화되고 만다.
이처럼 건국헌법이 정파간 이해내지는 최고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좌지우지된데다 총리인준 과정에서도 배신과 정략이 개입되게돼 우리 헌정사의 파란만장한 굴절은 이미 건국때부터 예고돼 있었다고 할수있다.
국무총리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혼돈의 와중에서 국가백년 대계보다는 정파간 타협에 의해 기형적으로 탄생됐기 때문에 역대총리가 제도 도입의 취지인 내각제적 역할을 해내기보다는 최고 통치권자의 완전휘하에 들아가 임명권자의 눈치를 볼수 밖에 없는 숙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평균재임 기간이 1년5개월을 넘지못했고 1공화국때인 54년 11월부터 60년 4월까지는 국무총리없이 부통령제가 도입되기도 했다.
최장수는 9대 정일권씨(6년7개월)이며 11대 김종필씨(4년6개월) 12대 최규하씨(4년) 등도 장수총리였다.
최단명 총리는 국회인준을 받지못해 서리를 못떼고 11일만에 물러난 이윤영씨이다.
두번씩 총리직에 오른 사람은 2대총리·2공화국 총리를 역임한 장면씨,6·25당시 서리·4·19직후 과도정부 수반을 지낸 허정씨,자유당·공화당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백두진씨 등 3명이다.
▷지위와 역할◁
현행 헌법상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무위원에 대한 임명제청권 및 해임건의권을 가지며 대통령 유고시 권한대행을 할 수 있는 정부 제2인자·대통령 보좌기관의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개각때 총리의 각료제청이라는 헌법상의 절차가 지켜진 적은 거의 없고 주요정책결정이 청와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총리의 지위는 명문상 규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대로 법적으로 제2인자이기 때문에 정치쟁점이 부각될때면 총리가 화살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고 총리의 진퇴는 어김없이 도마에 오르곤 한다.
이런 연유로 현행 국무총리제가 「대통령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막아주는 방패역」으로 활용되는 편의주의 발상의 산물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총리제 지지론자들은 갈등 구조가 심화된 우리 정치현실에서 중간조정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부통령의 경우 행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반면 총리는 행정통할을 담당하는 실무역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주장한다.
또 특히 힘있는 총리가 등장할수록 완충역할이 두드러지는데 현 노재봉총리가 어떤 의미에서는 대통령에게 돌아갈 정치적공세를 대신 당하는 전형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에 대한 완충과 방패역할이 총리제도의 효율성과 유능한 총리를 담보하는 충분조건이 될수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어디까지나 편법에 불과한 것이다.
법리상으로도 민선 부통령에 비해 임명직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 1순위가 된다는 것이 국민대표성의 원칙에 위배되고 현실적으로도 청와대행정부처 라인이 총리의 중간 조정없이도 별 무리 없이 운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더구나 총리 임명에 국회동의가 필요하고 국회의 총리 해임의결이 있을 경우 내각이 총사퇴해야 하는 내각제적 요구가 있다면 총리가 책임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져야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권한보다는 책임이 강조되고 정치상황에 따라 민심수습이라는 명분의 「속죄양」 역할이나 하는 현실에서 명실상부한 총리제도의 정착은 요원하다 할 수 있다.
총리제도의 정착을 위해서는 최고통치권자의 「운영의 묘」와 정치권의 총리제도에 대한 입체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총리가 직책수행에 있어 정치력을 발휘해야함은 물론이다. 많은 총리들이 임명권자의 의중만 헤아리다가 뜻을 제대로 펴지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30명의 총리◁
초대총리인 철기 이범석씨는 국방문제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뒤를 이은 신성모 서리는 6·25직전 『순양함 한척만 있으면 남북통일은 문제없다』고 호언하는 등 상황인식을 제대로 하지못했다.
이어 장면 총리는 전시중 미국지원을 적절히 끌어 들였으나 이대통령의 견제로 사임하고 만다. 3대 장택상 총리는 직선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켜 「정치총리」라는 닉네임을 얻기도했으나 정적을 많이 만들어 재임 5개월만에 좌초했다.
4대총리 백두진씨는 「백재정」이라는 호칭이 따를 정도로 통화개혁,경제재건 5개년계획 등 전시경제회복에 힘썼다.
1공화국 마지막총리인 변영태씨는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대통령에게 장기집권길을 터주고 물러났으며 그후 60년 4·19까지는 총리직 대신 부통령제가 도입됐다.
4·19후 대통령제와는 달리 내각책임제 아래서 모처럼만에 실권자의 총리에 오른 장면씨는 5·16에 의해 사퇴당하는 오욕을 맛본다.
3공의 첫 총리인 최두선씨는 「방탄내각」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출발했지만 혁명주체들과의 동질성 결여로 단명에 그쳤다.
이어 등장한 정일권 총리는 한일 국교정상화,경제개발 등의 추진에 일익을 담당한 「돌격총리」 「장수총리」로 평가됐다. 70년말 백총리가 다시 기용됐고 그후임에는 명실상부한 「정치총리」인 김종필씨가 등장했으나 남북대화·김대중 납치사건·유신 등의 와중에서 후계자적 이미지 때문에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 했다.
다음의 최규하 총리는 의전·대행에 충실한 「대독총리」였고 10·26후의 혼란기에 총리직을 수행한 신현확·박충훈씨는 정치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했다.
5공 출범후 경제전문가인 남덕우·유창순 총리에 이어 취약한 정통성 보완을 위해 「삼고초려」끝에 영입된 김상협 총리는 『막힌곳을 뚫겠다』는 취임일성과는 달리 「정치학총리」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 취임한 진의종 노신영 이만기 김정렬 총리중 노총리는 실세에서 후계설까지 나돌았다.
6공에서는 이현재·강영훈·노재봉 총리로 이어진다.<이영성기자>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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