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이 30돌이 됐다. 강산이 세번 변하는 평면적인 세월의 흐름이 아니라 5·16이후 30년은 반세기가 채못되는 건국 이후의 우리 역사에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16에 대한 공과는 논외로 하더라도 5·16이 우리사회의 구석구석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역사에 대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5·16이 없었다면 3선개헌,10월 유신,10·26,5·17과 같은 헌정사의 소용돌이가 있을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사물을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발상으로 접근해 타협과 양보를 배격하는 소위 군사문화와,부와 권력의 편재로 인한 갈등구조의 양산 등 우리사회가 안고있는 「구조적 모순」들의 시원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5·16을 전후로한 60년의 상황이 우리사회가 전 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양을 준비한 시기인데다 4·19이후의 욕구분출 현상이 사회적 혼란을 가져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당시의 제3 세계에서는 군의 정치개입이 보편화되었고 개발독재가 공공연하게 정당화 되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할 대목은 5·16이 남긴 부의 유산을 정리하는 일이지 않나 싶다.
절대빈곤의 추방과 경제발전,국가적 자신감의 고양 등 5·16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의 평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국가적 위기상황이 생길때마다 제기되는 「원죄론」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회 각분야을 통합·선도해야할 정치판이 이렇게 낙후돼 버린게 국가적 위기상황도래의 주범이고 그 근본이유가 정치발전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군의 정치개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5·16이후 꼭 19년만에 터진 5·17과 곧이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지금까지도 우리사회에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요인을 제공하고 있다.
분신치사정국이 출국를 찾지 못한채 위기감이 고조돼가고 또다시 거리에 최루가스가 난무하는 시국상황은 5·16이 남긴 부의 유산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부의 유산을 정리·청산하거나 아니면 최소한으로 극복이라도 할 수 있을때 우리사회의 성숙성은 높아지고 내구성은 공고해질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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