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조세형의원 「IPU총회 8박9일」 체류기/의원이 본 북한:3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조세형의원 「IPU총회 8박9일」 체류기/의원이 본 북한:3

입력
1991.05.09 00:00
0 0

◎나무없는 산 나무없는 동네/식량증산 위해 밭일궈/기계화된 협동농장 책임생산제로 운영북한엔 공해가 없다. 공기도 맑고 물도 맑다. 자동차가 적으니 매연도 없고 공장이 많지 않으니 폐수도 없다.

그러나 북한에 없는 것은 공해뿐 아니라 산에 소나무도 없다. 온통 산야가 다 벗겨져 산 사태가 나고 모래가 쌓여 하상이 높아져 있다.

골재 재취 좋아하는 남한의 건축업자들이 보면 황금시장 만난듯 기뻐 나자빠질 만하게 되어 있다.

왜 북한의 산하가 이렇게 되었을까? 별사람을 만나 별말을 다 들어 보아도 신통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산에 석회질이 많아 나무가 잘 안자란다? 그럼 이조시대에는 석회질이 없었고 광복 되자마자 석회질이 많아 졌나?

온통 송충이가 먹어서 다죽었다는 설명도 있다. 그럼 금강산이나 모란봉이나,혹은 옛날 이수일과 심순애가 산책했다는 대동강변 부벽루 근처는 송충이떼가 피해 다녔나? 이런곳은 소나무가 울창한 것을 보면 그것도 말이되지 않는다.

북한에 나무가 없는것은 산만이 아니라 동네에도 없다. 어떤델 보면 삭막한 황토 흙위에 3∼4층짜리의 어설픈 시골 아파트가 서있는데 이것은 흡사 중동의 어느 사막 근처를 연상케하기 조차한다.

기차로,고속도로로 수백㎞를 다녀봤지만 차창에 비치는 동네에 나무다운 나무가 서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누군가 말하기를 땔감이 귀해서 모두 베어서 장작으로 땐것 아니냐는 해석이었는데 그말이 그럴싸 했다.

북한의 산야에서 온통 나무가 베어 없어졌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했을뿐 아니라 분노하게까지 만들었다.

평양이 고향인 박영숙의원은 「내고향에서 변치 않은것은 대동강물 한가지뿐」이라며 마음속으로 몹시 노해 있었다.

그러나 산에 나무가 없는데 대한 정답은 역시 「식량증산」에 있었다고 본다.

어느날 갑자기 최고 지도자가 산에 나무를 베어 다락밭을 일구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일제히 산을 삭발해 버린것은 아닐까? 그뒤 다락밭 개간은 그다지 성공한것 같지 않다.

산이 모두 자갈투성이고 땅이 메말랐으며 밭이 손바닥만해서 인력이 무척 많이 들었다. 할수없이 과수를 많이 심었으나 그것도 그다지 탐탁한것 같진 않다.

평양 과일가게에서 파는 사과가 꼭 탁구공만한것은 이러한 척박한 다락밭 과수원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인게 틀림없다.

식량증산. 그것은 북한의 절대 명제인듯이 보인다.

잘 알다시피 북한에는 토지 사유제도가 없다. 모두가 나라땅으로 모두가 제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평양시내에서 사십리쯤 떨어진 학산협동 농장이 바로 그 식량증산의 현장중 하나다.

북한에선 면이 없어지고 군 밑에 바로 이 단위이지만,이런 농장은 대개 3∼4개 정도의 이가 합쳐서 한 협동조합을 이루고 있다.

학산농장의 경우 모두 1천1백 세대에 인구가 5천4백명,노동인구가 2천7백명쯤 된다. 농장은 모두 1천5백정보인데 이중 9백정보는 논이고 4백정보가 과수원과 뽕밭,나머지가 밭으로 되어있다.

이 농장 관리가 김호석씨(53)에 의하면 작년 한해 논 농사에서 쌀을 8천5백톤이나 초과생산했는데 그중 1천5백톤은 농장주민 몫으로 제해두고 7천톤을 국가에 팔았다 한다. 쌀뿐 아니라 기타 수확을 합쳐 작년에 세대당 평균 4천6백원씩의 이익을 분배해 주었다는데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농사짓는게 대학교수 하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이 된다.

이 농장에는 자동차 20대,트랙터 80대,기타 상당수의 모내는 기계,모뜨는 기계,제초기 등이 있다. 북한에서도 이제 소쟁기로 논밭을 가는 일은 거의 없고 모두가 트랙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농촌의 큰 문제는 이런 외형에 있지 않고 이 많은 협동조합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협동」 하느냐에 있었다.

농장에는 알곡생산외에 과일,누에고치,축산,야채 등 분야별로 갈라진 작업반이 30개가 있었다. 그리고 각 작업반 아래 10∼15세대로 편성된 분조가 있다. 북한의 논밭에서 무리지어 일하는 20명 내외의 일꾼은 바로 이분조원들이다.

이 분조는 1년의 생산책임량을 할당받는다. 60년대까지는 농장이 지배인 체제하에 있었지만 그뒤 제도가 바뀌어 이제는 노동당의 지역위원회 감독하에 있으며,도시의 직장이나 공장들도 모두 당 지도하의 책임 생산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20명 내외의 분조원간에도 경쟁관계가 있다. 하루 일하는 성적에 따라 매일 저녁 회의를 열어 점수를 매겨준다. 누구는 1점,또 누구는 2점… 이런 식으로 해서 그 합계를 가지고 이익을 분배해주니까 이건 다분히 시장경제 원리와도 통한다.

북한에서 제일 일잘하는 이를 「6백공수짜리」라 부르는데 이것은 한해 6백점을 얻으면 거의 영웅에 가깝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얼마의 점수를 매겨주느냐는 것은 같은 동네사람끼리 냉혹한 문제이지만 그것을 분조장과 몇몇 간부들이 맡아서 하고있으니 별수없이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북한의 농가는 이와 같은 공동농장제도외에 50평에서 1백평 정도의 개인 채소밭을 경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얼마간의 부수입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산을 깎아 다락밭을 일구고 농업을 집단영농 화해도 여전히 식량부족의 고통을 못벗는 것이 북한의 최대고민중 하나이다.

어서 빨리 남아도는 남한의 쌀을 갖다 먹고 북한의 시멘트를 우리가 소화해주는,그런날을 앞당길수 없을까.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