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하진 못해도 자족모습/공산품은 「20년전 수준」/「조직」된 인민들 「남쪽사람」 대응법 잘알아/같은 핏줄이지만 사고달라 안타까움도우리의 북한방문 9일간은 수박으로 비유할때 꼭지 부분에서 몸통 부분으로 얼마간 표면을 더듬다가 돌아온데 지나지 않는다.
속이 잘 익었는지 설익었는지,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특히 일반 사람들의 생활형편이 어떤 상태인지,또 일반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무척 애도 써봤지만 도무지 속을 들여다 볼 길이 없었다.
짧은기간 치고는 꽤 많이 돌아다녔다.
서커스를 하는 교예극장,천재교육을 시키는 소년 문화궁정,우리가 예배를 드렸던 봉수교회나 장충성당,물건이 제법 풍성했던 평양 제1백화점,예술작품과 공예작품을 함께 만들고 있던 만수대 창작관,젊은여학생들이 우굴대던 김일성대학,그리고 지하 1백미터를 내려가는 평양의 지하철,심지어 평양시내 개선동의 한아파트 가정에 이르기까지.
시내 한복판 천리마 거리에서는 우리 몇몇이서 거의 기습적으로 이발관과 야채가게,고기상점과 잡화가게,빵집도 들러보았다.
사실 이 천리마 거리의 가게 방문에 관해서는 할말이 많은데,이것 말고도 우리는 차를 몰아 평양교외에 있는 학산협동 농장에도 가보았다.
평양에 있는 동안애는 먼발치로나마 김일성 주석이 나타나는 행사에 두어번 참석할수 있었다.
주석궁 옆에 있는 금수산 의사당의 만찬 초대때는 불과 10여m 떨어진 식탁에서 한시간 넘게 담소하고 식사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소문과는 달리 80고령(명년이 80세)치고는 건강한 편이었다.
우리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비록 옛날 주은해 중국수상과 이후락씨가 묵었다는 숲속의 주암 초대소에 격리,투숙되기는 하였지만 가자는 곳이면 어느 곳이난 대개는 주선,안내해주었다.
때마침 5·1 노동절 휴일을 맞아 대성산 공원에 봄놀이를 나온 수백 가족들 사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다닐 수도 있었고,대동강의 능라도 운동장에서도 평양 시민들과 제약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을밀대로 가는 공원 잔디에서는 20명,30명씩 무리지어 노래하고 폴카춤을 추는 대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뛰어들어 함께 노래부르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물론 금강산도 다녀왔다. 평안남도의 증화,상원군을 지나 황해북도의 연산,수안,신계,곡상,신평군을 거쳤고,강원도에 들어서선 원산시와 법동,통천,고성군을 통과해서 금강산에 다다랐었다.
귀로에는 일부러 원산시내에 들러 일본을 내왕하는 삼지연호 등이 정박중인 원산항이라든가 옛모습 그대로라는 송도원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수박겉에서 1㎝도 더 파고든것 같지 않다.
그 많은곳,그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도 여전히 북한의 껍질을 못벗겨본 까닭은,지난 40여년간 잘 조직화되고 순치된 북한 인민들은 더 이상 감시가 없어도 어떻게 하는것이 「남조선사람」을 대하는 적절한 방법인지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내받았거나 구경이 혀용된 많은 곳들은,그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이 조직화되고 연출된 것들이다.
심지어 「기습적」으로 들어 닥친셈인 천리마거리도 그런것이었고,대성산 공원초입에서 우리가 유인된 가족들의 음식 차림도 그런것들이었다.
우리는 북한측의 이런 처사가 몹시 서운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곳에 있는 동안 거의 한마디도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이렇게까지 궁색스럽게 꾸미지 않을수 없는 입장을 지대할 수는 없으나 이해해보려 노력하였고 어떤면에서도는 마침내 북한이 남쪽 형제에 대해,특히 남쪽의 보도진과 카메라앞에 이 민큼이라도 문을 열어보인것을 평가하려 노력하였다.
우리가 본것은 잘조직회된 그곳의 「인민」 들이었지만 끝내 우리가 현장까지 짚어보지 못한것은 그들의 진짜 생활상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증후를 종합해볼때 그들은 실로 오랜 각고 끝에 잡곡밥 이지만 끼니를 때우며,허술하지만 고루 차리고 다니고 또 각기 나라에서 주는 집칸에서 기거하는 등 기본 수요는 그렁저렁 꾸려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거기까지는 사회주의가 해놓은 결과일 것이다. 공산품은 우리의 20년전 수준이고 거리의 사람들은 깡마르고 까칠하지만,공해가 없는 공기와 물을 마시며 나름대로의 건강도 누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문제는 이제부터일 것이다. 기본 수요이상의것,좀더 잘 살아보겠다는 욕구가 외부의 개방물결과 함께 일어나게될때 북한 사회는 과연 그 충격을 어떻게 소화할까?
북한은 우리와 같은 핏줄인 점에서 우리와 동일하지만,완전히 딴 세상,딴 사고에서 살아온 점에서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이 모순된 갈등 속에서 북한은 때로 밉기도 하였고 때론 안타깝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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