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은 두번 슬프다. 김영균군의 갑작스런 죽음에 이어 장례절차를 둘러싸고 유가족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은채 장례를 제때에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4일 상오 분신자살한 안동대생 김영균군(20·민속학 2)의 유해가 안치된 대구 경북대 영안실 앞에서는 김군이 숨진 지난 2일부터 장레절차 문제로 엄숙해야할 빈소 주변이 계속 시끌벅적 했다.
가족장으로 결정한 유가족과 국민장을 고집하는 범시민대책회의 간에 고함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까지 연출됐다. 가족장 발인 예정시간인 4일 상오9시가 가까워지자 유족측에서는 『야 이놈들아 영균이 애비마저 죽이려 드느냐』는 유가족측의 절규까지 터져나왔다.
김군 유해를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도 아버지 김원태씨(54)는 『학생 여러분,아버지의 심경을 이해하시고 영균이가 조용히 떠날수 있도록 해주시오』라며 『영균이를 살려내라』고 연호하는 안동대생 1백여명에게 타이르듯 호소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좀체로 주장을 굽히지 않자 김씨는 끝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가족장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독재가 아니냐』고 외친뒤 실신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3일 하오 아버지 김씨는 자청한 가지회견에서 『아들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되며 영균이와 같은 젊은이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도 기필코 가족장으로 치르겠다』며 유가족의 뜻을 분명히 했었다. 김씨는 이어 『이같은 고통과 비극은 영균이의 죽음으로 마지막이 됐으면 하는 심정에서 영균이를 열사로 호칭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1시간후 「김영균학생 분신 범시민대책회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장례는 김열사의 뜻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고 강경대 열사와 같은날에 민주국민장으로 치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밝히고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설득,대책회의의 원칙이 수용되도록 노력하겠다』며 그들의 뜻을 굽히려하지 않았다. 대책회의는 3일 밤부터 4일 상오까지 유족들과 4차례나 만나 집요하게 국민장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상오6시께 일단 영안실 앞에서 영혼 분리굿을 지낸뒤 김군의 가관과 분향소를 마련,국민장을 준비했다.
김군의 영구차는 ▲안동대에서의 노제 ▲화장하지 말것 ▲대구역까지 2㎞ 구간의 시가행진 등 대책위의 3가지 요구를 뒤로 한채 시립화장장으로 조용히 떠나갔다. 김군의 뜻은 어느 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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