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이번 방일 일정을 짜느라,일본 사람들은 약간 애를 먹었을 것 같다. 일정협의 막판에 그의 한국방문이 발표되고,나가사키(장기) 방문이 추가된데다,방문이 시작된 뒤에도 일정변경이 거듭됐기 때문이다. 그탓에 한·소정상의 만남은 한밤이 될 수밖에 없었고,그나마 그의 제주일정이 확정되지 않아 우리마저 애를 태워야했다.국내에서는 이를 두고,일본측의 훼방을 생각하는 추측이 없지 않았으나,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설명은 좀 다르다. 그 설명에 의하면 고르바초프의 나가사키 방문은 소련측 요청이었고,그것은 소련의 국내사정을 반영한다는 것이었다. 그 설명의 줄거리는 이런 것이다.
45년 종전 때,소련은 일본군 포로 등 57만5천명(최소한 1만명 이상의 한국인 포함)을 시베리아에 보내 강제노동을 시켰고,그중 5만명이 죽었다. 일본 「돈」이 아쉬운 고르바초프는 이 감정의 응어리를 풀 필요가 있었고,그것이 일본측 요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방일도중 일부러 하바로프스크에 들러 일본인 묘지를 참배하는 등의 일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소련의 보수강경파는 물론 참전군인들에게는 그런 움직임이 못마땅하다. 그들로서는 방북 4도와 「돈」을 맞바꾼다는 발상을 용납할 수가 없다. 이 반발을 중화하는 방도로 나온 것이 고르바초프의 나가사키 소련인 묘지 참배였다는 것이다.
이 경위에 일본 입김이 작용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앞서와 같은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것 자체가,고르바초프의 약화된 국내 입지를 엿보이게 한다. 그에 대한 소련사람들의 지지도가 작년 5월 57%에서 금년 1월 27%로 곤두박질했다는 여론조사 결과(3·17 일본 독매신문)는 그 실증이다. 우리나라에서의 그의 인기가 67%라는 조사결과(4·18 조선일보)와는 퍽 대조적이다.
이번 일·소교섭의 결말은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질 수 밖에 없다. 고르바초프 특유의 결단력신사고 외교의 신통력을 발휘할 여지가 좁아 든 때문이다. 난항을 거듭한 그 교섭과정에서 돋보인 것은 오히려 외교스타가 없는 일본이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과 일본 「돈」의 대소위세였던 것 같다. 일본으로서는 북방 4도를 언젠가는 돌려준다는 언질을 교섭 30년만에 끌어냈고,정경불가분의 원칙을 관철한 셈이 되었다.
그래서 일·소 공동성명의 한반도 조항도 좀 다른 각도에서 읽게 된다. 남북대화,일·조 정상화,북한의 핵사찰 수용 등을 촉구한 그 내용은,비록 남·북한 유엔가입 문제가 빠진 아쉬움은 남지만,우리로서는 크게 환영할만 하다. 그러나 이 조항을 실효있게 할 방도는 무엇일까,과연 이 조항대로 북한을 움직일 지렛대는 어디 있을까묻는 것이 일·소 공동성명을 읽는 또 하나의 시각이다.
이 경우,소련의 대북한 영향력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 일단은 이미 작년 6월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때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사설이 제기한 물음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김일성을 페레스트로이카로 전환시킬 의지와 수단을 갖고 있는가에 잘 요약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반대답은 얻은 셈이다.
결국 남는것은 일본이다. 잘라 말하면 지금 북한을 움직일 유력한 지렛대는 일본 손안에 들어있다. 그 지렛대의 쓰임은,일본이 대북한 정상화교섭에서 얼마나 원칙을 지키느냐에 달렸다. 그 양상에 따라 북한의 개방이 빨라질수도 있고,한반도 평화정착이 앞당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번 일·소 공동성명은 일본 지렛대를 위한 받침점(지점)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일·소,한·소의 만남이 있은뒤 우리가 더욱 눈여겨 볼 것이 이점,다시말해 일·조관계의 진전양상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은 일본이 대소교섭에서 보여준 정경불가분의 원칙이다. 이 원칙을 북한에도 일관되게 적용한다면,북한의 핵사찰 수용은 지금까지와 같은 단순한 「중대사안」이 아니라 의당한 전제조건으로 되어야 한다. 대남적화정책 포기도 마찬가지요,수교전 경협이란 있을 수가 없다. 나아가 경협자금은 민생수요에 국한되어야 하고 인권문제를 포함한 북한의 민주화와 시장경제 도입에 연계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이 경협의 기본목적에 비추어서나,효율을 위해서도 옳은 것이다. 우리로서도 이점에서 일본식의 이중기준,이전외교가 없도록,요구할 것은 요구하고,미리 한·일간 북한정보의 공유,대북한 경협의 공동참여 태세를 갖출 필요가 있다.
고르바초프 방일을 앞둔 지난 10일 가이후 일본총리는 개발원조(ODA) 정책의 재검토 방침을 밝혔다. 국회답변을 통해 그가 제시한 재검토 방향은 수원국의 ①군사비 지출정도 ②핵·생물·화학병기와 미사일의 개발여부 ③무기의 수출입동향 ④민주화 상황 등을 고려하는 원칙아래 원조제공 여부를 결정함으로써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새 원칙이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는 알 수가 없으나,일본정부의 소신이 그러하다면,그 원칙은 대북한 경협에 먼저 적용하는 것이 마땅할줄 안다. 일본정부가 말하는 원칙이 어떤 것일지 이 역시 눈부릅뜨고 지켜보아야할 대목이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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