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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외교 공치사」/정경희(아침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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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외교 공치사」/정경희(아침조망)

입력
1991.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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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전의 비극『…불야성속 극락이니 항구안에 3백만 인구요 휘황한 금이 흙처럼 널리고 술이 샘솟듯하네』­95년 전인 1896년 미국의 뉴욕에 당도한 김득련이 읊은 시였다. 그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경축사절로 가는 민영환 일행의 수행원으로 4월1일 마포나루를 떠났었다. 민영환 일행은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타고 중국의 상해와 일본을 거쳐 미국을 철도로 횡단,다시 대서양을 건너 모스크바에 닿기까지 꼬박 51일이 걸렸다.

이때 민영환은 러시아 정부에 대해 5개항의 원조요청서를 갖고갔다(윤영교씨). 국왕을 보호해주고,정부 고문관과 군사교관단을 보내주고,러시아·한국 사이의 전신선 연결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맨 마지막에는 일본에 진 빚을 갚도록 3백만원을 재정차관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다섯가지 가운데 3백만원의 재정차관은 끝내 소식이 없었다.

이때 이 나라의 「주권」은 바로 러시아공사관 안에 있었다. 고종 임금이 비극적인 소위 「아관파천」으로 이 나라 주권의 자리인 대궐이 비어있을 때였다. 러시아는 이무렵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 원시림의 벌채권과 함경도의 광산개발권,그리고 동해의 고래잡이를 독점하고,또 부산의 영도를 차지하겠다고 무력시위를 했다.

갑신정변의 「3일 천하」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이때 미국공사의 부탁을 받고 고종황제를 뵙고 환궁하기를 간청했다. 『대궐로 돌아가십시오. 한국은 폐하의 땅이요,백성도 폐하의 백성입니다. 이 땅과 백성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고종 임금은 대답했다고 한다. 『글쎄,그렇지만 무서워 어디 갈 수가 있어야지』

○『죽기 아니면 살기』 계획

95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옛날 3백만원의 재정차관을 요청했던 한국은 이제 거꾸로 30억달러의 차관을 주는 입장이 됐다. 또 갖가지 기술원조를 주고 받는 입장도 반대가 됐다.

그것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바람이 몰고온 탈냉전과 소련의 사회·경제적 진통의 결과로 빚어진 역사적인 사건이다. 소련의 어려움은 경제적 자유화(개혁)와 사회적 개혁(개방)을 한꺼번에 이루려는데서 온 위기라고 미국의 마셜·골드먼은 말하고 있다.

지난 2일 소련은 시장경제로 가는 첫 걸음으로 소비자물가를 큰폭으로 「현실화」 했다. 주식인 호밀빵은 자그마치 4배,우유는 2배로 뛰었다. 지난해 산업생산은 1.2% 줄었고,기름과 무기수출이 줄어 올해에는 국제수지 적자가 애초에 예상됐던 1백11억달러를 훨씬 웃돌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게다가 각 자치공화국들이 세금을 내지않아 연방정부의 재정파탄 위기가 겹치고 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지난 9일 내놓은 경제개혁안을 놓고 서방측은 「죽기 아니면 살기」 계획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대부분 내년까지 실현할 목표로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위한 계획이다.

예를 들어 금년말까지 파업을 금지하고,내년 10월1일까지 완전 자유시장가격을 실시하고,금년 6월까지 국영산업 사유화 계획을 짜고,인플레를 잡고 수입을 줄이고,경제특구를 만들어 외국자본을 유치하는 등등으로 돼 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동북아 나들이는 말하자면 경제위기가 심화되고,야심적인 시장경제전환 계획과 함께 날짜가 잡힌 꼴이다.

○말로 주고 되로 받기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은 지난해 12월 노태우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에 대한 답방이 된다. 그러나 그는 서울이 아닌 남쪽 제주섬에,그것도 해가 지기시작할 무렵을 앞두고 서너시간 머문다는 계획을 통고해 왔다. 그나마 제주방문은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서』라고 세상에 발표했다.

물론 해질 무렵 서너시간이라 해도 소련의 「전통적 동맹국」인 북한을 제쳐두고 제주도부터 방문하는 것은 고르바초프가 한국에 주는 「호의」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만큼 모스크바와 서울의 관계는 묘한 관계인 셈이다.

고르바초프가 제주도에서 펴놓을 「속셈」이 무엇인지는 아직 추측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은 소련의 동북아 경제권안과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구상에 대한 논쟁을 시작했다. 미국과 한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 안보 구상에 반대하고,중국은 동북아 경제권에 소련의 주도적 역할을 반대했다.

그러고 보면 서울­모스크바 외교는 한국의 어느 정치인,어느 직업관료,어느 정치집단이 잘 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리석은 「공치사」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외교도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힘을 쓴다. 95년전의 교훈을 잊지않고,말로 주고 되로 받는 어리석은 실책을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 소련이 책임져야할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비롯해서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분명한 발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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