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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육사→보안사→청와대 인맥/5공실세(한국일보 월요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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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육사→보안사→청와대 인맥/5공실세(한국일보 월요포럼)

입력
1991.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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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화평­우삼수」 이·장사건후 유랑길/83년부터 허문도 부상… 당과 사사건건 마찰/장세동,막후실세서 후계자 대열에7년 6개월에 걸친 제5공화국은 전두환 대통령이 상징하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창출되고 주도되었다. 정규육사와 보안사 출신이 주축이된 신군부세력은 때때로 민간인 출신 엘리트들의 조력을 받긴했지만 5공의 한시대를 완벽하게 전단했다. 대통령중심제 아래서 권력집중이 두드러지듯이 5공역시 전대통령 주변에 포진한 몇몇실세들의 막강한 영향력이 확연했고 힘의 집결지는 역시 청와대였다. 전대통령은 자신이 몸담아왔던 보안사참모들을 대거 이끌고 80년 9월1일 청와대로 입성했다. 이렇게 출범한 5공은 실세들이 대부분 전대통령과의 상관관계를 토대로 세를 형성해 나갔다.

5공 7년반의 세월은 정권정착기로 볼수있는 초기(80·9∼82·12) 본격가동한 중기(83∼85·2) 그리고 6공에로의 이양을 할수밖에 없었던 후기(85년 12대 총선이후∼87년말)로 구분해 볼수있다.

정착기에 허화평 비서실보좌관(보안사 비서실장 출신) 허삼수 사정수석( 〃 인사처장) 이학봉 민정수석( 〃 대공처장) 장세동 경호실장 권익현 민정당대표 허문도 정무비서관(중정부장 비서실장) 등이 실세그룹이었다면 중반기에는 두 허씨(허화평·허삼수)가 물러난 공백기를 허문도 정무수석과 이민정수석이 메우려 이들이 여권의 막후실세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중반기이후 5공말기까지의 이양기는 경호실장을 거쳐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장세동씨가 전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아래 사실상 「2인자」 역할을 한다.

특히 장씨의 경우 초반의 막후 실세에서 중반들어 명실상부한 전면의 실세에 나섰다고 볼수있다.

5공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경원­이범석­함병춘­강경식­이규호­박영수­김윤환씨 등 모두 민간인 출신이 맡았고 경호실장은 정동호­장세동­안현태씨로 이어진다. 이들 가운데 5공말 비서실장을 지낸 김윤환씨(현 민자사무총장)가 6공과의 가교를 맡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고 경호실장은 장세동씨만이 경호업무 이외의 「막후역할」을 했을뿐이다.

의전수석은 김병훈 비서관이 전대통령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좌했고 정무1수석은 우병규­허화평­정순덕­허문도­김윤환­이진우씨가,정무2수석은 김창식­김태호­안응모­유흥수­김용래­강우혁씨가 맡았다.

경제수석은 김재익­사공일­박영철씨가,공보수석은 이웅희­황선필­정구호­이종률­최재욱씨가,민정수석은 이학봉­김용갑씨로 이어졌다. 교육문화수석은 이상주­손제석­신극범씨가,사정수석은 허삼수­정관용­김종건­이양우씨가,85년에 신설된 법무수석은 이중근씨가 자리를 지켰다. 총무수석은 전석영­이재식씨가 맡았다.

5공 초기에는 3허씨가 실세그룹을 형성한데다 군출신이 주축이된 강성인사들이 주로 전대통령을 보좌한데반해 후반기로 갈수록 외견상으로는 이들이 퇴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컨대 5공 말기에는 수석비서관 10명중 군출신인사는 김용갑 민정수석 단한명뿐이었다.

▷정착기◁

○…5공 초기 청와대를 주도한 인사는 대통령 비서실보좌관에서 정무1수석으로 자리를 바꾼 허화평씨와 육사동기(17기)인 허삼수 사정수석을 들수 있다. 이들은 정권출범초기의 포석은 물론 개각 등 주요인사와 각종정책결정에 이르기까지 국정전반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한 핵심세력의 양축이었다. 허사정수석이 전대통령의 막후역할을 담당한데 비해 허정부수석은 「전권」을 총괄한 「권력의 핵」이었다는게 당시 청와대 및 여권인사들의 한결같은 얘기이다.

80년 가을 해외공관에 근무하다가 허화평씨로부터 자신의 입각을 통고받은 A씨는 그당시 신군부에 의해 주도되는 서울현지사정을 잘모른 탓으로 허씨와의 전화통화에서 『허화평이가 누구요』라고 물었다가 귀국후 허씨가 「대단한 실세」 임을 알고 사과해야만 했다. 5공초기 허화평씨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실세그룹의 리더였다.

허정무수석은 허삼수 사정수석과 함께 공직자 숙정작업을 주도했는데 5공초 N외무장관을 찾아가 김용식 주미대사 등 67명의 외교관을 「정리」하고 대신 최상섭씨(현 네덜란드 대사) 등 육사 17기가 중심이된 군출신인사 12명을 대사로 임명해달라는 「지시」를 할정도였다.

민정당 초기 원외사무차장이었던 이상재씨는 전대통령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이씨의 사무차장기용은 허삼수씨가 권정달 사무총장을 견제하기위해 「감시역」으로 앉혀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질만큼 두 허씨의 당시 위상은 막강했다.

그러나 과도기의 한시대를 주름잡는가 싶던 두 허씨가 82년 5월 「이·장사건」을 계기로 하향길에 접어든다. 이들은 개혁을 앞세우다 이규동씨 등 이순자여사 측에게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했고 백운택장군 등 육사11기 군부 실세들에게도 견제를 받았다.

결국 두 허씨는 「이·장사건」에 이어 실명제 파동을 겪으면서 곤경에 빠졌고 그해 가을 자리에서 물러나 나란히 해외 유랑생활에 들어간다. 이들의 거세배경은 당시 여러가지 억측을 자아냈으나 「이·장사건」으로 전대통령의 처 삼촌인 이규광씨가 구속된 사연과 직접관련이 있었다는게 정설.

▷중반기◁

○…전대통령이 노신영 외무장관을 안기부장에 기용하면서 나눈 대화내용을 보면 그런대로 「정착단계」에 접어든 통치에 대한 자신감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갑자기 출범한 대부분의 권력이 그러하듯 초반기의 「참모의존형」에서 점차 모든것을 통치권자가 직접 챙기는 「직할통치」를 예고하고 있다. 전대통령은 『나도 별 네개를 달고 대통령을 맡아보니 처음에는 얼떨떨했지만 이젠 자신감이 붙습니다. 아무말 말고 한번 잘해 보시오 노부장을 격려했다는 것이다.

중반기에는 민정당이 정내혁당 대표가 투서한장에 축출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민정당과 국회는 직할통치를 시작한 청와대의 입장에서 보면 부속물이었다.

「좌화평 우삼수」라고 일컬어지는 두 허씨가 권부를 떠난이후 5공 초기에 정무비서관을 맡았다가 문공차관으로 물러나있던 허문도씨가 전대통령의 본격적인 활동기에 청와대 실세로 급부상 한다.

허씨는 80년의 격동기에서 전대통령과 인연을 맺은이래 특유의 우익논리와 저돌성으로 전대통령의 눈에 들었다는게 지배적인 견해이다.

언론통폐합 주도·학원안정법 제정·버마의 네윈식 정권이양 구상 등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입안됐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

허씨가 정무수석으로 있는동안 청와대와 민정당과의 관계는 갈등과 불화의 연속이었다.

학원안정법 제정을 둘러싼 당정간의 난기류가 대표적인 사례중 하나이다. 그는 민정당에서 대부분 학원안정법 제정을 반대하고 있는데도 중집위원 등에게 강권과 회유를 하면서 밀어붙이려고 했다. 그당시 노태우 대표도 반대했고 특히 이종찬 총무를 비롯해 이학봉 민정수석 등이 적극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때부터 이총무는 5공에서 「핍박받는 인물」이 된다.

당시 여권의 한 고위인사는 전대통령이 「이종찬이를 구속시켜야 겠다」고 진노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양기◁

2·12 총선이후 노태우 대표위원이 민정당을 이끌어 가지만 5공후반기는 개헌정국과 맞물린 후계구도문제가 최대관심사로 부상한 가운데 장세동 안기부장이 부동의 막후실세로 등장해 한때 후계자 반열에 오른다.

장부장은 남북관개 개선 등 정국의 주요고비에서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는 86년 건대 사건과 유성환 의원의 국시파동 등으로 이어지는 공안정국을 사실상 주도했고 개헌정국의 막다른 골목에서 신민당 이민우 파동에서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87년 봄 4·13호헌조치를 전후해 여권에서는 누가 후계자가 될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됐다. 정가에선 노태우대표·노신영총리·장부장중에서 후계자가 결정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전대통령의 측근이었던 A씨는 『전대통령이 노대표를 후계자로 굳힌 시점은 87년 3월말쯤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5공후반기 주요현안결정시 노대표·노총리·장부장·박영수 비서실장이 고정멤버가돼 고위 당정회의를 갖곤했는데 4·13조치 결정을 앞둔 당정회의에 노총리가 배제됐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그리고 또 그해 5월 박종철 고문치사 2차사건이 터졌을때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정호용씨가 앞장서서 자신을 포함해 노총리·장안기부장도 공동 인책돼야 한다고 주장,이를 관철시킨 대목 등은 노대표의 후계자 사전정지작업 일환이었다는게 중론이다.

그러나 6·29선언직후 청와대 비서실장에 김윤환 정무수석이 기용됐으나 전대통령은 당초 장세동씨를 마음에 두고 고심했었을 정도로 장씨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5공말기 김윤환 비서실장만이 노대표와의 가교역을 맡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다소 행사한 것을 제외하곤 나머지 청와대 참모들은 대체로 정권교체에 대비한 실무처리에 치중했다. 장세동씨·안현태 경호실장·이양우 사정수석·허문도씨 등이 정권이 교체된뒤 「백담사캠프」를 형성하면서 6공과 등을 돌린 대목을 보면 한때의 권세가 「화무십일홍」임을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다.<조명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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