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변화·대량실업 영향/통독 전보다 10배… 40∼60세 남자 많아경제체제 붕괴에 따른 대량실업사태를 겪고 있는 구동독 주민들이 「무력감과 좌절」 때문에 자살하는 사례가 폭발적으로 증가,체제변화가 극심한 진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원래 구동독 지역은 전세계적으로 헝가리 다음으로 자살률이 높았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분석되지 않고 있으나,동서독간 장벽에 접해 있던 작센주 및 튀링겐주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 분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풀이됐었다.
지난 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동독지역의 자살률은 다소 낮아진 것으로 추정돼왔다. 이는 「민중혁명」 성취와 분단해소에 따라 동독주민들의 자신감과 사회적 기대가 높아진 때문으로 풀이됐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대량실업 등 사회체제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다시 자살률이 통일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증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경찰과 관계전문가들은 최근 몇 달 사이 체제붕괴와 연관된 자살 즉 「사회적 요인」이 동기가 된 자살이 과거에 비해 10배 이상 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동베를린의 한 자살기도 환자 전문의사는 『무력감과 좌절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고 그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
이같은 진단은 여러 측면에서 확인되고 있다.
우선 대량실업사태에 희생된 사람들의 경우 실제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도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시사주간 슈피겔지에 의하면 최근 라이프치히시의 목재공장 작업조장으로 있던 60세의 동독인은 원래 정년을 몇 년 남겨둔 상태에서 퇴직통고를 받은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동독인은 연금과 주택을 제공받는 데다 부인이 아직 직장을 갖고 있어 별「문제」가 없는 감원대상으로 분류됐었다.
이 사례 외에도 40∼60세의 남자들의 자살이 특히 많은 현상이 주목되고 있다.
이를 동독 전문가들은 『동독의 중년 이상 세대들은 「노동은 신성한 것」이란 의식을 깊이 갖고 있다』고 전제,『이에 따라 이들은 실업사태 속에서도 자신의 실업을 개인적 치욕으로 받아들여 인격의 중심을 손상받는다』고 자살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저명한 자살문제 전문연구가인 할레대의 헬무트·슈페테 교수는 이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 전체의 좌절」에서 오는 현상으로 분석한다.
그는 『현재 동독사회는 서독의 물질적 부와 경쟁체제 앞에 「백인의 소방호스 물세례를 처음 받은 인디언」과 같은 당혹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다』고 비유했다. 이어 그는 『보통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 자기보호본능도 강해져 자살이 줄어들지만,동독인들은 변화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행동양식을 몰라 좌절에 빠져 있다』고 설명했다.
동베를린 「비밀상담전화」의 한 관계자도 『실업위기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동독인들의 의식이 체제의 급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최근의 한 「자살」사례는 동독인들의 체제변화에 대한 적응력 결여와 무력감을 극명하게 드러내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약 2주 전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주 슈베른시에서는 청소부로 일하다 실직한 42세 된 여인이 난방도 없는 아파트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숨진 채 발견됐다. 「실업위험이 없는 동독체제」 속에서만 살아왔던 이 여인은 「서독체제」의 관행대로 실업수당을 청구하거나 은행 등에서 돈을 꾸는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앉아서 죽음을 맞은 것으로 추정됐다.
고몰카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주 총리는 『이 사건은 동독주민들의 무력감을 상징한다』며 『이같은 「사실상의 자살」은 결코 예외적사건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충격과 우려를 표시했다.
할레대의 슈페테 교수도 『동독사회는 이제 막 「좌절」단계에 접어들었다』며 『깊은 절망의 나락이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했다.<베를린=강병태 특파원>베를린=강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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