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의 눈부신 전개에 넋을 잃었던 것도 한때였다. 국내의 관심은 이제 모처럼의 풀뿌리민주주의의 착근이라 할 지자제선거에 온통 쏠려 있다.하지만 우리는 걸프전이 남긴 또 다른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교훈이 우리의 풀뿌리 착근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가슴 속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인가.
최근 서구에서는 하버드대 교수 출신의 에너지경제학자 다니엘·여긴이 쓴 명저가 단연 화제이다. 전리품 또는 현상품을 뜻하는 「The Prize」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석유·돈·권력을 향한 서사시적 탐구」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석유에 얽힌 투쟁·갈등·재앙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는 내연기관이 활용되기 시작한 1차대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석유야말로 바로 권력과 지배권의 동의어라고 갈파한다. 그리고 석유는 안보와 번영,그리고 현대문명 자체의 핵심으로,인류가 다른 에너지원을 만들어내기까지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다고 솔직히 지적한다. 또 이 같은 절대절명의 존재인 석유는 도덕적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어서,지금껏 온갖 다툼의 표적이 되어 왔고,결국 인류야말로 거꾸로 석유의 덫에 걸려 있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걸프전의 본질적 의미는 보다 분명해진다. 남의 나라를 짓밟은 독재자에 대한 국제적 응징이라는 겉보기의 안쪽에는 끝없는 지배력의 확보라는 갈등의 본류가 도도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석유란 존재로 인한 이 같은 갈등의 본류는 과거 2차대전을 일으켰고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들어 아랍주의와 서구문화의 대결이라는 도식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소위 냄새고약한 「텍사스·티」로 알려진 절대절명의 소중한 석유가 자칫 오판과 덧없는 비극의 원천이 되고도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이번 걸프에서도 서방측은 중동석유의 안정적 공급확보에 급급한 나머지 갖가지 단견과 허점을 노출했다. 서방측은 82∼89년 사이 이란과의 세력균형을 위해 이라크측에 무려 1백34억달러어치의 각종 무기를 제공했었는데 그 무기들이 총구를 돌려댔던 것이다. 웃기는 사실은 이들 무기대금의 상당부분을 이번 전쟁에서 피해를 본 사우디와 쿠웨이트가 갚아줬다는 점이다.
서방측의 결정적 오판은 정보분석에서였다. 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국경에 구름같이 집결하고 있는 첩보위성사진을 보고서도 단순한 허세로 보았고,침공 1주일 전 미국 대사는 후세인에게 『우리는 쿠웨이트 국경분쟁 같은 아랍권끼리의 다툼에 관심이 없다』고 태연히 말했다는 것이다.
첨단기술정보능력을 갖추고서도 그걸 정확히 분석해낼 인간정보능력의 결여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을 결과적으로 자초했던 셈이다. 『적의 적은 우방이다』는 단순논리에 사로잡혀 독재를 눈감아주다 되레 기습당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석유가 사람들 눈을 멀게 하고 엄청난 비극을 안겨 준다는 사실은 이번 전쟁에서 아랍세계 쪽의 사정을 보면 충분히 짐작간다.
같은 혈통과 언어·종교의 이슬람 세계가 엄청난 권력과 힘의 원천인 석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잿더미가 된 나라와 빚더미,그리고 또 다른 무기구입 경쟁의 촉발뿐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는 이라크의 몰락은 후세인의 광기 때문이라지만 아까운 석유를 마냥 태워버리고 있는 쿠웨이트,5백억 달러라는 엄청난 전쟁비용 부담으로 이젠 빚을 얻게 된 사우디이다.
OPEC산유국 11개국을 통틀어 지난 8월부터 석유값이 오르면서 3백88억달러의 추가수입을 올렸는데 통계가 나와 있지만 그 같은 횡재도 파괴와 군비경쟁의 악순환 속에서 이미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한다.
또 이번 전쟁의 초연이 가시기도 전에 벌써 중동으로 무기바자가 문을 열어 미국은 올해 전세계동맹국에 판매할 3백30억달러어치 첨단무기 중 3분의2를 중동국가에 할당키로 했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이 같은 비극의 또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결국은 진정한 국력과 국민적 여망을 결집,나라를 바로 이끌 수 있는 제도의 미비 탓으로 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석유라는 엄청난 힘의 원천과 아랍주의라는 그들 나름의 대의를 갖췄다지만 그 부와 이념이 독재·전제권력의 유지나 같은 형제국을 짓밟는 수단으로마저 오용될 때 힘과 번영은 커녕 허망한 자기파괴와 낭비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수서문제도 그렇고,나라가 온통 법석인 지자제선거도 걸프전이라는 세계적 사건의 교훈과 두루 맥이 통함을 알 수가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를 내려 작은 마을에서부터 오순도순 주민들의 현명한 선택이 모아질 때 나라힘도 제대로 발휘되어 수서와 같은 부정도 감시·견제될 수가 있고,걸프전에서 보는 다른 나라들의 오판이나 자기파괴를 우리만은 비켜갈 수도 있을 게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세계는 좁아져 이제 한 울타리다. 중동석유에 일희일비하는 우리로서는 하루빨리 그곳에 민주적 질서가 자리잡혀 세계정세가 안정되길 바라고 있고,그런 만큼 우리 풀뿌리선거의 소중함도 더욱 자각되어야 할 시점인 것이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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