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사태가 발생한 지난해 8월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시나리오라는 말이 갑자기 자주 쓰이고 있다. 평화적 해결방안,이와 반대로 전쟁이 날 경우의 상황,미국의 대응책 등 수많은 시나리오가 만들어졌고 전쟁발발 이후에는 다국적군의 D데이 H아워에 관한 예상이나 미국의 후세인 제거계획,지상전의 시기와 양상에 관한 시나리오가 계속 보도됐다.전쟁이 끝난 지금에는 미국의 중동평화구상과 미소 관계 및 세계질서 개편,전후복구 문제에 관련된 시나리오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의 최첨단 무기가 총동원되고 각종 전자장비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공지능 기술이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한 전쟁을 전자오락 즐기듯 재미있게 구경한 탓일까. 우리도 걸핏하면 시나리오라는 말을 쓰면서 일정한 사태의 기승전결을 구경하는 습성이 굳어져가는 것 같다.
시나리오라는 말을 열쇠로 풀어보면 모든 일이 정말로 사전에 짜여진 것처럼 그럴 듯하다. 뇌물외유사건으로 구속된 한 야당 의원은 자신들이 당한 것은 시나리오대로라고 주장했다. 모두 4탄까지 있다는 이 시나리오는 1탄이 뇌물외유,2탄이 수서사건이며 곧 3탄으로 국회 교체위 소속의원이 걸려들고 4탄째에는 여성관계가 문란한 의원들이 거덜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3탄 4탄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수서비리 자체와 이에 대한 검찰수사는 모두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 것이며 「의원 때려잡기」 외에도 부산 인공섬 조성,제주 탑동 매립,잠실 제2롯데 비리 등 폭로시나리오에 의해 드러날 부정이 많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또 지자제선거가 기초·광역 분리실시로 결정되고 26일로 기초의회선거일이 예상보다 빨리 잡히자 여권의 시나리오라는 비난이 높아졌고 각 정당은 정당개입 금지규정을 무시한 채 당세확장을 위한 시나리오의 실현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시나리오는 근본적으로 영화화를 전제로 한 것이며 영화는 관객이 없으면 무의미한 종합예술이다. 또 아무리 생생한 논픽션을 다룬다 하더라도 영화의 기본속성은 픽션화이며 관객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구경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영화를 통해 재미를 얻거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접경험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나리오라는 말은 어느 경우이든 음모와 공작의 냄새가 난다. 이 말이 거듭 사용될수록 불신과 배타성,구경주의(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로 요약되는 방관 경향은 증폭되고 있다.
시나리오라는 말이 필요해지고 그 말이 상당한 호소력을 획득하게 된 우리 사회의 공작주의 불신주의 구경주의를 경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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