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 대응자세로 미 비난공세 받아/「여론」 달래기 급급… 「정치난장이」 절감/「미 주도」에 영향받을듯걸프전은 유럽의 새로운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독일에 직격탄을 안긴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0월 통일과 함께 급부상하던 독일은 걸프사태로 갑자기 「황혼」을 맞았다고 언론들은 탄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충격의 와중에 독일과 미국의 관계는 2차대전 후 서독이 미국 주도의 서유럽 동맹에 편입된 이래 최악의 상태로 급변했다.
따라서 걸프전 종식은 독일의 향후 행로와 독미 양국 관계의 재조정 문제를 비상한 관심사로 부각시키고 있다. 냉전종식을 상징하는 통일독일과 냉전 이후 질서를 주도하려는 미국간의 새로운 관계설정 방향은 앞으로의 국제질서의 구도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걸프사태 초기부터 미국이 「평화질서 정착」을 명분으로 국제적 분쟁으로 확대하는 것을 반대해왔다.
유럽의 평화기류를 해치고,특히 소·동구 재건 등 독일의 정치·경제적 이익에 결정적 방해물이 될 것이란 것이 독일의 우려였다.
이 과정에서 양국이 걸프전 비용분담과 군사력 지원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은 갈등의 한 단면이었으며 이 논쟁의 표면화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일의 고민이었다.
미국은 독일이 통일비용의 힘겨운 부담과 헌법상의 군사력 해외파견제약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구실」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특히 미 의회와 언론은 『통일지원의 공을 배신했다』는 비난과 함께 『미 국민은 독일의 배신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위협」했다.
그 「위협」은 여러 갈래로 현실화됐다. 미국정부는 지난해 7월 동서 화해무드 속에서 합의했던 코콤(대공산권 수출규제위) 리스트 완화를 걸프사태를 이유로 영국과 함께 반대,통일독일이 도약의 관건으로 삼고 있는 동구재건 주도에 발목을 잡고 나섰다. 가트무역협상과 관련,일방수입규제를 단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도 독일을 주대상으로 한 「보복」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일에 치명상을 입힌 것은 미영 언론이 이라크를 화학무기 등으로 무장시킨 주범이 독일인 양 몰고간 것이었다. 나치의 독가스 만행을 전세계에 상기시킨 이 비난공세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라크의 독가스 공격위협과 오버랩되며 독일을 「나치콤플렉스」 속에 침몰시켰다. 독일 언론들이 『졸지에 황혼을 맞았다』고 비탄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지도자들은 독일이 「정치적 난쟁이」에 불과함을 절감하면서 1백70억마르크의 전비부담약속 등으로 「세계여론」을 달래기에 급급했다.
걸프전 종식에 대한 독일의 반응은 「안도감」으로 집약됐다. 콜 총리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라고 전례없이 미국을 치하하면서 헌법개정을 약속했다. 또 겐셔 외무장관과 뤼헤 기민당 사무총장을 잇달아 워싱턴에 보내 미국의 「분노」 진정에 몰두하고 있다.
미국의 외교안보연구소인 랜드·코퍼레이션의 로널드·애스무스는 최근 디차이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걸프전이 미국에 갖는 의미를 독일이 외면한 것에 분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은 독일이 냉전 이후 세계에서 미국과 함께 「지도적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해왔으며,걸프전을 독일의 향후 행로에 대한 시금석으로 간주해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결과적으로 독일의 「지도의지」에 대한 신뢰가 상실됐으며,유엔 안보리상임이사국에 대한 소망 등도 무산됐다』고 평가했다.
물론 이같은 미국 쪽의 진단은 걸프전을 통해 운신의 한계를 절감한 독일이 미국의 세계질서 주도에 적극 동참하라는 촉구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양국간 갈등의 바탕이 근본적으로 「전략관」의 차이에 있다는 데 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는 『미국은 브란트의 동방정책 발진 이래 독일의 대소 유화정책이 독일의 「핀란드화」로 이어질 것을 무엇보다 경계해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논평은 이어 『레이건 행정부 이래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신보수주의 진영은 80년대초 미국의 퍼싱Ⅱ미사일의 독일배치를 둘러싼 양국간의 갈등에서 위기를 느껴왔다』고 전제,『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대소 유화자세를 상징하는 「겐셔리즘」에 대한 의혹은 오히려 고조돼 왔다』고 분석했다.
보수계열인 이 신문이 걸프전 종식과 함께 이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은 양국의 냉전 이후 세계관의 간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독일은 당분간 미국의 「위세」 앞에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토 개편과 유럽통합·군축논의 등도 미국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끌려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유럽의 「대세변화」를 역전시키기 위해 걸프사태를 이용했다는 의혹이 독일인의 마음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상황은 미국의 장기적인 유럽전략 주도를 위협하고 있다.
독일의 「정신적 향도」 바이츠제커 대통령은 이미 『걸프사태는 미래를 향한 것이 아니다』고 천명하고 있다. 진보적인 권위주간지 디차이트는 『그래도 독일은 「독일의 길」을 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베를린=강병태 특파원>베를린=강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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