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할머니 이복순씨(77)가 충남대 장학회에 기증한 땅의 처리문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건설부는 이 할머니가 내놓은 50억원 상당의 토지 중에서 임야를 제외한 30억원 상당은 택지소유상한법에 저촉돼 장학회 재산으로 취득할 수 없다고 유권해석했었다. 대전시도 장학회가 기증받은 땅을 팔아 기금으로 사용한다면 허가할 수 없다고 밝혔다.이내 경직된 법적용방침과 꽉막힌 관리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수서사건 때는 택지개발촉진법 시행령의 관계규정을 임의로 확대해석해 비리의 정당화를 도와주었던 건설부가 이 경우에는 자구대로 엄격하게 법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건설부와 대전시의 태도는 한마디로 관위주의 행정타성과 수서 이후 더 심해진 무사안일,보신주의의 반영이었다.
그러자 대통령이 나섰다. 『즉각 관계처리끼리 협의해 대책을 마련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총리실,건설부는 부랴부랴 되는 방향으로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견지했던 엄격한 법적용방침은 흔적도 없어졌다.
과연 이것이 잘된 일인가. 오히려 우리는 이 문제로 좀더 시일을 끌면서 진통을 겪었어야 옳았다고 생각한다. 법규정을 지키려는 선의의 고집과 선의의 반대주장간의 논쟁과 갈등을 통해 사회적 합의가 도출됐어야만 행정의 자생력이 커지고 국민들의 행정에 대한 신뢰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통령의 한마디라는 타율에 의해 일이 처리돼 가고 있으니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무사안일의 되풀이는 재연될 것이다.
사정은 좀 다르지만 수서사건에서도 검찰은 눈치만 보다가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서야 수사를 시작했다. 늑장수사가 고속종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검찰이 소신껏 수사를 했을까의 여부는 수사착수의 타율성으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걸핏하면 대통령이 나서라고 말하며 보다 강력한 통치력과 장악력을 요구하곤 한다. 대통령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아버지인 것처럼 찾아가 고자질하고 매달려 떼를 쓰거나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직도 공무원들과 국민들의 일반적 행태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경우 권위주의를 자초하거나 권위주의의 청산에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대통령은 전지하고 전능한 초월자가 아니다. 대통령은 자율성 독립성과 자생력을 갖춘 사회 각 부문의 갈등을 관리하고,제도화된 갈등의 민주적 조정을 통해 국정을 수행해나가는 국민의 대표자이다. 자꾸 대통령이 나서게 하면 안된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아버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어린아이로 머무르려 하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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