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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늪… 탈출구를 열자/한상진 서울대교수·사회학(사회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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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늪… 탈출구를 열자/한상진 서울대교수·사회학(사회진단)

입력
1991.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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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얼굴들이 정치정풍 일으키도록「수서사건」의 사법적·정치적 마무리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무겁다. 법적용에 공평무사해야 하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함에 칼날같이 매서워야할 검찰이 청와대와 행정부를 감싸는 모습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어쩐 일인지 금융기관은 한보를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다. 대통령의 사과도 의례적인 수준에서 끝났다.

검찰의 발표대로 청와대1급비서관 한 명이 단독으로 이처럼 큰 사건을 배후조종할 수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언론에서 누누이 지적한 문제의 핵심을 검찰은 피했을 뿐 아니라 정경유착의 본질,외압의 실체에는 전연 접근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 사건은 6공의 행보를 위협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13대국회는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었고 정치권·행정부·재벌 등 사회 전체에 부패의 구조가 넓게 확산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사회지도층 전체가 도덕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것은 국민들의 불신이 총체적인 체제불신으로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을 만한 지도자가 없고 대체세력이 없다는 낭패감,제도권 전체가 썩어 있어 탈출구가 안 보인다는 절망감이 커지고 있다. 부유계층의 횡포 앞에서 서민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사회지도층을 모두 「도적놈」으로 표현한 시인도 있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뭔가 속시원한 진실규명과 비리척결을 원하지만 체제가 이 요구를 수용할 수 없어 간극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총체적 위기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수서사건」만 하더라도 검찰 수사는 일단락되었지만 여기저기 잠복해 있는 의혹들이 많아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를 폭발성을 안고 있다. 내각개편 등 미봉책으로 민심의 동요를 막을 수는 없다. 시민들의 항의집회가 예고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대응책이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의 비등하는 불만과 불신을 해소하려면 「수서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재수사해야 할 것이다. 서울시와 건설부의 「불가」 방침이 왜 어떤 경위로 번복되었으며 한보가 뿌린 비자금의 규모와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차제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이 체질상 이것을 하기 힘들다면 특별검사제도를 도입해서라도 진실규명을 해야 한다. 법적 근거 이전에 대통령의 의지가 중요하다. 진실로 그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면 대통령의 명예를 걸고 공정수사를 명령할 일이지 악취가 풍기는 비리의 뚜껑을 적당히 닫을 일은 아니다. 그래야만 국가기강이 서고 검찰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며 국민의 관심 속에 새로운 정치무대가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집권층의 위험부담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 도덕성 회복이 쉬운 일이던가. 진실을 은폐·축소함으로써 상황변화에 따라 장차 엄청나게 늘어날지도 모를 부담에 비한다면 정직과 신뢰를 되찾아 정치 경제 사회발전의 새로운 획을 긋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용기있는 결단이 될 것이다.

다음,깨끗한 정치를 하려면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정치자금의 갹출과 배분을 완전공개,합리화시키는 개혁과 돈 안드는 공영선거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할 것이다. 정치부패의 구조적 원인은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 동안 정치자금을 거의 독식해온 정부·여당이 이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아울러 금융실명제도 조속히 도입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제도개혁이 이루어졌더라면 수백억 원의 비자금과 뇌물같은 대형부조리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제도권 전체가 공멸의 위기로 시달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로운 정치의 출구를 열 것인가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으며 비관주의에 빠져 있다. 13대국회를 해산하고 새 출발하고 싶으나 제도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과감한 정치수혈이 필요한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양심적이고 믿을 만한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제도권에 진입,정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지방의회선거는 이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물론 정당들도 양질의 후보를 많이 내야겠지만 현재와 같은 난국에서는 양심적인 「서민후보」의 진출이 기대된다. 특히 공명선거캠페인에 앞장서는 시민운동단체들의 활동에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지자제선거법에 이들의 활동을 극도로 제약하고 있어 법개정이 시급히 요청된다. 이들의 헌신적이고 공정한 활동에 힘입어 지방의회선거가 새로운 정치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하면 의회제도는 정말 파탄에 직면할 것이다. 독재의 출현을 경고하는 소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그러나 이 분기점에서 우리가 성공한다면 만성화된 불신의 늪으로부터 빠져나오는 탈출구가 밑으로부터 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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