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년 3선개헌 반대로 첫 시련/3번 복학 끝 결실… “쑥스러워”지난 69년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한 뒤 3선개헌반대시위부터 85년의 민청련사건까지 4차례 구속되고 3번 복학했던 최민화씨(43·출판업·서울 마포구 염리동 21)가 입학 22년 만에 졸업을 하게 됐다.
그 22년에는 3공부터 5공까지의 수난과 시련이 새겨져 있다.
대학신입생으로 한 학기도 지내기 전인 69년 6월 3선개헌반대시위에 나섰다가 수배된 최씨는 4개월의 도피생활 끝에 연행돼 같은 해 11월 반강제로 입대해야 했고 72년 4월 제대와 함께 복학했다.
다시 1학년이 된 최씨는 고 함석헌옹을 모시고 동료학생들과 함께 간디사상연구회를 만들거나 KSCF(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 서울지구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하게 학생운동을 했다.
그러나 2학년 때인 73년 4월 남산부활절연합예배에서 시위를 주도했다가 국가내란예비음모혐의로 또 연행됐다. 동료학생 10여 명과 함께 보안사 서영고 분실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고 풀려난 뒤에도 최씨는 편안하게 대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유신치하인 73년 10월2일 「중앙정보부 해체」 「김대중 납치 해명」을 요구했던 10·2 데모의 주역으로 연행되는 등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김근태씨와 함께 구속될 때까지 경찰과 정보기관에 끌려간 것은 30차례가 넘는다.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최씨는 제적된 연대생 17명,해직된 김찬국 김동길 교수와 함께 복학원·복직원을 냈으나 이 문제로 문교부와 대립한 박대선 총장이 물러났고 복학은 끝내 할 수 없었다.
최씨는 김동길 교수를 모시고 제적생들과 함께 비밀리에 역사공부를 하다 76년에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또 1년2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자유의 몸이 된 78년 옥바라지를 해온 운동권 후배 박혜숙씨(*38·이화여대 약대졸)와 결혼,1년여 동안 행복을 맛보았다.
그러나 10·26 직후인 79년 11월 최씨는 명동YWCA 위장결혼식사건으로 다시 1년의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부인 박씨는 남편 대신 복학원을 내 허락을 받았지만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다는 이유로 몇 달 뒤 제적돼 옥중에서 복학하고 제적당하는 경험도 했다.
석방된 최씨는 아예 복학을 포기,「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고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등에서 활동하다 민청련사건으로 1년6개월간 복역했다. 최씨가 87년 4월 출소했을 때 위암 3기인 부인 박씨는 대수술을 받고 누워 있었고 빚보증을 잘못 서준 바람에 집과 약국까지 다 넘어갔다.
최씨는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돈 43만원으로 친구의 작은 인쇄소 구석에서 전화기만 갖춘 출판업을 시작했다. 재야인사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87·88선거 때 인쇄물 제작을 많이 한 덕분에 빚도 갚고 서울 중구 오장동의 40평짜리 건물 3층에 나눔기획이라는 인쇄소를 차릴 수 있었다.
부총장이 된 김찬국 교수의 권유로 89년에 3학년으로 복학한 최씨는 아내의 병을 구완하면서 만학도로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의 정성덕분인지 부인도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최씨는 25일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쑥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전민련 대의원,민청련 상임위원으로 활동중인 최씨는 『요즘 학생운동은 사고의 폭과 깊이가 심화됐으나 노선상의 갈등을 빨리 뛰어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또 『진보세력은 분열로 망하고 수구세력은 부패로 망하는 역사의 교훈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원일희 기자>원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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