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직시할 때 세상의 모든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우리들을 유혹하며 우리들을 정궤에서 일탈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내 힘이 모자라서 유혹을 당하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법관된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54년 3월20일의 법관훈련회동에서 대법원장 가인 김병노(1888∼1964)가 한 말이다. 이 훈시중에서 법관이라는 말을 공직자로 바꾸기만 하면 수서사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나라 사법의 틀과 뼈대를 세워놓은 터주요 어른」이었던 가인은 대법원장재직시절(48년8월∼57년12월)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 차례 대립하면서도 소신과 기개로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 나갔고 청백을 몸소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 정년퇴임할 때 가인은 『전 사법종사자에게 굶어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했던 것은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명예롭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민족주의적 법률가·정치가」의 생애를 조명한 「가인 김병노 평전」은 왜소하고 나약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넣어주는 책이다. 이 책이 더욱 흥미로워진 것은 저자가 대통령 사회담당보좌역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전 서울대 교수 김학준씨이며 「집필을 강력히 권고하고 뒷받침해 준 외우」가 가인의 친손자로 역시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김종인 경제수석비서관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 가인의 친손자는 얄궂게도 수서사건 때문에 참고인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장손에게 가인은 『조금도 외로워하지 말고 공부 잘하여 세상을 떳떳하게 살아가면 밥 굶는 일은 없는 법이다』라는 말로 용기를 복돋워주곤 했다 한다. 그런 할아버지의 손자가 삼청동의 검찰청 별관에 불려갔을 때의 참담한 심경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를 비롯한 청와대 전·현직 관계자들이 검찰발표대로 정말 결백하다면 모든 공직자들은 공직자의 처신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며 「이하부정관(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의 삼엄함을 지켜가는 일이 얼마 중요한가를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여론은 결코 잠잠해지지 않고 전면 재수사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지도층 전체가 신뢰성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수사에 외압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자초한 검찰은 법조 선배 가인의 행적을 살펴 가차없고 엄정한 수사를 다시 해야 할 것이고 공직자들은 가인의 말을 경청해야 할 때다. 무릎을 끓고 할아버지에게 배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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