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워진 예약자/홍선근 경제부기자(기자의 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워진 예약자/홍선근 경제부기자(기자의 눈)

입력
1991.02.20 00:00
0 0

서울시내 모 음식점의 17일자 예약장부에는 유독 하오 7시의 예약자 칸만이 칼로 긁혀 지워져 있다. 그래서 누가 예약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회동을 했는지 예약장부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다행히 남자종업원의 말을 통해 이날 은행장 몇명이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이 곳에서 한보그룹의 채권은행단 대표 4명이 설날연휴의 마지막날 휴일을 반납하고 긴급회동,한보그룹에 대해 추가 자금지원을 해주고 정태수 회장가의 경영권도 그대로 유지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신용의 상징적 존재랄 수도 있는 은행장급 인사들이 무슨 까닭으로 「모였다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예약장부를 칼로 긁도록 하는 점잖치 못한 행동을 해야 했을까.

모임이 있고 난 다음날인 18일 상오 11시까지도 통상은행장회의를 주선하는 실무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날 회의에 나갔던 참석자들조차도 모인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겼다.

한 참석자는 그 모임이 끝난 직후 전화를 걸어온 취재진에게 『김영석 조흥은행장이 부산에서 올라오면 내일께 한 번 만나볼까 한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라든가 『말하기가 곤란하다』고 하면 취재원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셈이다. 은행장이라면 이 정도 상식과 예의는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까지 감수해야 했을까.

이날 모임 사실이 뒤늦게 공식적으로 공표되는 상황에 이르자 참석자들은 특히 자발적으로 모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날의 모임뿐만 아니라 공표되는 과정조차도 당국이 개입했으리라는 추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해주고 있다.

그 동안 한보어음이 매일매일 수십 억원씩 결제만기일이 돼 돌아오는 위태 위태한 상황에서 대책이 빨리 마련돼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으면 한보측의 자구노력과 자금상태가 파악돼야 가능하다던 은행장들이 갑자기 「자발적」으로 연휴를 틈타 모임을 갖고 태도를 돌변시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5공 때의 국제그룹 해체가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세평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6공 때의 한보그룹 구제 역시 정치적 특혜결정이라는 세평을 받으며 두고두고 의혹으로 남게될 것이라고 금융계에서는 보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