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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희극」의 피에로들/박승평(아침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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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희극」의 피에로들/박승평(아침조망)

입력
1991.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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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의 참맛은 우리 삶의 엉뚱함·부조리·덧없음에 대한 격의없는 웃음과 그 뒤에 남는 진한 여운 때문이다. 그 여운을 일러 「페이소스」 또는 연민이라고도 한다. 채플린의 희극을 보고 포복절도하다가도 관객들의 눈에 어느덧 이슬이 맺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인생살이에서 진정한 희극은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비극이기도 한 것이다.그런 차원에서 한 번 내다보면 세상을 온통 『웃긴다』는 소리로 떠들썩하게 만들면서 더러 국민들의 눈에 이슬마저 맺히게 하고 있는 수서사건이야말로 희극 중의 희극이라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한다. 때마침 거대 여당 의원들마저 『민자당 재정위원의 평민당 당비부담은 희극 중의 희극』이라고 쓴 입맛을 다셨다니 그런 생각이 망발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이처럼 수서사건이 희극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 그 다채로운 등장인물들이 펼친 현란한 연속 해프닝들 탓이 아닐까 싶다. 우선 이름이 오르내렸거나 쇠고랑을 찬 사람만 꼽아봐도 대충 높은 곳이라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청와대비서실장과 비서관들,여야당의 고위직과 들러리를 선 의원들,부총리와 장관·시장·국장 등의 행정부 고위관리들,그리고 엄청난 부정 드라마를 물쓰듯 한 돈다발로 태연히 연출한 녹지 재벌 총수에다 푼돈을 벌어보려했던 사이비 주택조합원에,내집마련의 꿈이 서러운 집없는 조합원들마저 두루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희극이나 팬터마임에는 으레 「피에로」나 어릿광대들이 등장한다. 특유의 분장과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로 꽤사를 떨며 관객을 웃기다가도 어느새 극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눈물젖게 하고 세상을 조롱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연극사에서도 「피에로」란 겉보기와는 달리 단순하지만은 않아 나름대로 복잡하고 독창적인 성격을 지녀 전설적이 되다시피한 인물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엄청난 「수서희극」의 어릿광대성 해프닝들을 어디 한 번 꼽아보자.

우산을 받쳐줄 똑똑한 수하 한 명 없어,가랑비에 옷이 푹 젖는 줄도 모르고 『최근 사건 별로 큰 문제가 아닌데…』하는 언론에 대한 섭섭한 발언이 있었다. 가랑비라 한다 해도 그 비가 어떤 비인가. 지독한 후유증을 안겨줄 부패성 산성비인데도 처음에 그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면 차라리 그 자리가 너무나 외로워진다.

양심을 걸었던 야당 총재의 다짐은 또 어떤가. 뇌물인지 정치자금인지 모를 엄청난 수표더미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고,「양심선언」의 옹색함에 이어 당황한 검찰의 변명해프닝이 따랐다.

스스로 수억여 원을 챙긴 터수에 이등병도 아니면서 어떤 양심을 펴보이겠다는 건지가 관객들을 웃기고,제 발이 저려 기자들과 수감중인 주범의 면담마저 주선하겠다고 하다 그 자리서 취소도 불사하는 당국의 연기가 또 관객을 자지러지게 하는 것이다.

「6천억원짜리 이권」이라는 데 청와대 1급 비서관은 비서실장에게,야당 의원은 총재에게 제때 보고도 안했다는 새빨간 연기도 일품이라면 일품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이란 의원들의 호통이 어째서 『어휴… 그 깡패』라는 「똥묻은 개」의 비웃음으로 변할 수가 있고,온 나라를 산성비로 결딴내고 있는 한보를 당국과 금융가에서 재빨리 살리려 나서고 있는 것도 「놀랄 노」자가 아닌가.

이밖에도 전·현직 시장의 책임 떠넘기기 공방,김운환 의원의 폭탄선언과 취소의 깜짝 쇼,주범의 증발 구설수에 건설부 국장의 입원소동,뇌물담당 경리여사원의 증발도 잇달아 관객들을 깜짝감짝 놀라게 해 왔던 것이다.

수서희극의 무대에서의 종막은 역시 18일의 검찰발표였다. 축소형·짜깁기·변명수사라는 소리를 듣건 말건 이렇게 끝낼 수 밖에 없는 수사당국의 처지에 관객들은 차라리 연민마저 느끼는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다채로운 피에로들의 현란한 코믹연기에서 차츰 깨어나 드라마의 진짜 줄거리를 새삼 헤아리고 있다. 어느 선배는 이번 일을 가리켜 『행정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할 기막힌 사건』이라고도 선뜻 표현했다.

최초의 무사려하달 수도 있는 한마디가 악덕업자의 뇌물농간과 겹쳐 「공영주택과 조합주택 건립의 한계」라는 명백한 행정행위를 놓고 여야를 막론한 정계와 각급 행정기관에서 추악한 연쇄 선심행정 및 들러리역 자청사태를 일으켰다. 어찌보면 이들 피에로들 모두가 거리낌없이 뇌물이라는 꿀단지에 달려들다 보니 아무도 뚜렷한 행정책임은 지려하지 않고 서로를 핑계대는 것만으로 엄청난 불법행위를 감쪽같이 엮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부패학 사전에 새 항목으로 등장할 만하다. 그래서 교과서도 고쳐써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러 처방이 나오고 있다. 정치자금 양성화와 돈 안드는 정치,정치인과 행정책임자 물갈이론에 국민자각론,직업관료제도의 정착론도 두루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들러리만 전면에 부각되고 돌팔매질을 당하면서 행정책임은 아직도 애매모호한 결말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래저래 수서사건은 우리에게 한국판 특유의 부패학을 연출한 희극이자 한없는 비극이었다. 지금 국민들은 배꼽을 쥐고 웃다 못해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가슴 속은 쓰라리다 못해 통곡을 삼키고 있다. 이러다 그 숱한 피에로들이 등장한 무대마저 와르르 무너지면 어찌 될 것인가. 수서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진정 눈물겨운 희극이었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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