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은 이슬람서양문명 싸움”/“지중해 지배 세계사 주도” 판단/서로 「세력」 확장·저지에 총력전/서구,승전 후 식민통치… 아랍권,「민족주의」로 맞서걸프전쟁의 본질은 무엇인가.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과 아랍의 1개 국가인 이라크가 맞붙은 걸프전쟁은 단순히 석유자원을 둘러싼 국가간의 이해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 전쟁은 이슬람세계와 서양문명간에 1천여 년에 걸친 기나긴 투쟁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번 전쟁의 진정한 의미도 알기 어렵다. 일본의 주간 아에라(AERA)지가 최근 분석보도한 「중동과 서양의 전쟁 1천년사」를 통해 걸프전쟁을 조명해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이슬람사회와 서양사회는 1천년 이상 서로 부딪치며 존재해왔다. 이슬람과 서양의 충돌무대는 지중해세계였다. 고대문명의 발생부터 제국과 왕국들이 무수히 생겨나고 멸망한 이후 로마제국이 현재의 중동과 북아프리카세계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리스와 이집트문화를 계승한 로마제국의 문명은 이슬람과 서양문화의 어머니였고 지중해세계는 그 아버지였다. 이 두 세계의 문명은 어떤 점에서는 형제간인 셈이다. 출생배경이 유사한 두 문화는 그 후 줄기차게 충돌,세계사의 흐름을 형성했다.
7세기께 이슬람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이 최후의 예언자라고 규정한 마호메트가 출현하고 지중해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 소수민족인 터키족이 6∼7세기에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이후 최강의 이슬람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처음 몇 명의 신자들로 시작된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죽은 632년께에는 점차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통일의 기초를 닦을 정도로 성장했다.
마호메트 사후 1백년 동안 이슬람이 로마제국을 능가하는 세력권을 형성한 것은 서양사회가 주장하는 「한 손에 코란,한 손에 칼」처럼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이 가지고 있는 유연한 제도 때문이었다.
현재에도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매우 용이하지만 당시에도 피정복자가 개종할 경우에는 정복자와 동일한 지위와 활동을 보장하고 있었고 이슬람이 아닌 자신의 종교를 지키는 경우에도 세금을 잘 내면 이교 신봉도 보장됐었다. 8세기의 서양은 날로 팽창하는 이슬람세력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서구세력의 이슬람에의 역습은 11세기 후반 십자군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1096년의 1차 십자군 원정부터 1270년 8차 원정까지 성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현재의 레바논,시리아,이스라엘 등에서 양측은 전쟁을 계속했다.
이 전쟁중에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등장,1187년 십자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십자군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88년 만에 되찾았다.
서양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오스만터키였다. 20세기까지 존재했던 이 나라는 1453년 「불멸의 대제국」이라고 서양세계가 인식했던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서양세계를 놀라게 했다.
8세기에 서쪽으로부터의 이슬람세력 진출을 간신히 제지했던 서양은 이번에는 동쪽으로부터의 오스만터키 위협에 시달렸다.
그러나 서양은 이슬람세계에의 반격을 개시했다. 무대는 스페인. 1492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지배했던 이슬람세력은 이베리아반도로부터 축출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중해세계에서도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전쟁을 벌여 1571년 그리스 해전에서 오스만터키 해군을 대파,서양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중동과 서양이 전쟁만 한 것은 아니다. 십자군 원정시대를 통해 서양사회는 이슬람이 향유하고 있던 그리스 로마의 학술과 문화를 아라비아 문헌들로부터 수입,후에 근대과학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한 근대과학의 기술을 토대로 서양은 세계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고 또 근대기술 발달에 따라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중동에 진출,식민지로 삼았다.
18세기께부터 이슬람세계의 기나긴 굴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종주국으로서 이슬람세계에 군림했다.
식민지 운영방식은 복잡해 알제리에는 서양에서 이주자가 집단거주,본국의 일부가 됐다. 모로코와 이집트는 군주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보호령으로 통치됐다.
1차세계대전으로 오스만터키가 멸망,서양은 이슬람세계와의 싸움에서 최종승리자로 자리를 굳혔다.
이슬람세계에서 민족의식이 일어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서양사회에서 대두한 민족국가의 성립은 이슬람사회에도 파문을 일으켜 19세기에는 민족의식이 싹텄다. 1차세계대전중에는 이슬람교도 중에서 터키민족과 아랍민족이 싸우는 사태도 발생했다.
영국은 아랍의 민족의식을 촉발시켜 대터키 전략에 이용했다. 1차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는 옛 오스만터키 영토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형태로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아랍민족주의는 서양과의 재대결을 야기시켰다. 전쟁은 서양 대 아랍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사태가 복잡하게 된 것은 유대인의 조국건국운동인 시오니즘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2차세계대전을 전후해 아랍 각국은 독립했고,이스라엘은 1948년에 건국됐다.
신생독립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서양 식민지세력의 「앞잡이」로 보았고 현재까지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다. 지난 79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다른 아랍국들과는 계속 대결상태에 있다. 또 이스라엘에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은 87년말부터 반이스라엘 비폭력 독립운동인 「인티파다」(봉기)를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도 이라크는 페르시아만 문제를 중동평화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어 사태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이라크는 걸프전쟁을 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유엔의 깃발에 감춰진 서양의 아랍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성전을 호소,이슬람세계의 대미 성전 참여를 부르짖고 있다.
때문에 유엔결의 정신으로부터 한발짝이라도 옆으로 나가는 경우 이번 전쟁은 서양과 이슬람간의 전쟁으로 진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상호 기자>이상호>
○걸프전 계기로 본 중동전사/48년 후 이스라엘아랍 4차례 접전/모두 이스라엘 승리… 「가자」등 아직 점령/애,경제 재건위해 79년 평화조약 체결
걸프전쟁 발발 이래 이라크는 이스라엘에 대해 미사일 공격을 감행,이스라엘의 참전을 유도하는 전략을 끈질기게 구사해왔다.
이라크가 이러한 전략을 사용한 이유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오랜 대립관계를 이용,다국적군과 이라크의 싸움을 아랍세계 전체와 미국 및 이스라엘의 싸움으로 변모시켜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실 아랍과 이스라엘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초래하면서 4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를 만큼 적대적인 대립관계를 유지해왔다.
팔레스타인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중동전은 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발한 이집트 등 아랍측이 2만명의 병력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데서 시작됐다.
이스라엘은 즉각 반격에 나서 당초 유엔이 설정한 영토보다 3분의1을 더 획득,유엔의 도움하에 새로운 군사분계선이 마련됐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국경선이 됐다. 49년 2월 휴전이 이루어졌으나 이 전쟁으로 1백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했다.
제2차 중동전인 수에즈운하 전쟁은 56년 아랍민족주의의 기수로 추앙받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항해를 거부한 데 대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 지배하에 있던 시나이반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유엔의 압력으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했으며 휴전감시를 위해 유엔평화유지군이 배치됐다.
「6일전쟁」으로 불리는 67년 6월의 3차 중동전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근거지 역할을 해온 시리아를 전면 침공하자 이집트와 요르단이 가세,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를,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요르단으로부터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점령,유엔의 점령지 철수결의안 및 상대국들의 반환요구를 무시한 채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다.
제4차 중동전은 73년 10월 실지 회복을 노리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나 북부전선에서 시리아군이 패배,전선이 고착화되자 유엔이 중재에 나서 휴전이 성립됐다.
이후 이집트는 시나이반도 회복과 경제재건을 위해 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30년간에 걸친 양국의 대결상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문제 및 팔레스타인 독립문제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대결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남경욱 기자>남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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