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는 의원」 아닌 「정책 두뇌」 도입 연구를얼마전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연두 임시국회의 당대표 연설에서 다음 국회의원선거에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관심을 끌었다. 선거제도 개혁논의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가 심심찮게 제기되었으나 한 번도 정치권에서 이를 진지하게 또 심층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던 터이기에 김 대표의 발언이 이 쟁점에 대한 보다 의미있는 대화를 여는데 기여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의 경우,그간 전국구란 이름으로 얼마간 비례대표제적 요소를 가미하여왔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선거제도가 소선거구,다수대표제를 근간으로 해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미 기존제도에 익숙해 있고 제도권 정당들도 큰 정당들에 유리한 이 제도에 대해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부정과 타락,금권으로 얼룩진 선거과정과 여기서 배출된 선량이란 이름의 무능하고 비도덕적인 숱한 「정치꾼」들 때문에 이제 온 국민이 정치권을 외면하기에 이른 오늘,독일의 경우처럼 소선거구제에 적정수준의 비례대표제를 가미하는 방안은 현행 정치질서의 쇄신과 장기적 정계개편을 위해 한 번 깊이 반추해볼 만한 발상이라고 본다.
우선 비례대표제의 도입은 어차피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아야 하는 소선거구,다수대표제에서 거의 불가피하게 빚어지는 첨예한 갈등과 대립,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각종 비리와 타락을 막을 수 있어,돈 안 쓰고 후보 서로간에 인격에 먹칠하지 않는 깨끗한 선거풍토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비례대표제는 유능한 전문 지식인을 정치세계에 대거 영입함으로써 만성적인 「지성의 빈곤」으로 속앓이를 해온 한국 정당정치를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앞으로 우리나라 정당이 파행적인 붕당정치의 수준을 넘어 생산적인 정책연구와 산출에 힘을 쏟는 근대적인 정책정당의 차원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탐욕에 눈이 멀고 권모술수에만 능한 「정치꾼」 대신에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고 고뇌하는 「정책두뇌」들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현행 선거제도는 선거판의 이전투구와 때묻은 정치관행에 익숙한 「한국형 정치꾼」만을 양산하는 메커니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바로 이 틀을 혁파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의회를 이들 전문지성들로 죄다 채우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는 역시 치열한 선거과정을 거치면서 선거민의 열렬한 사랑 속에 정치무대에 부상한 생명력 넘치는 직업정치인들을 필요로 하며,앞으로 선거과정의 계속적인 정화를 통하여 이들이 보다 당당하게 정계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선거구제가 잔존해야 할 소이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비례대표제는 다수대표제와 달리 사표를 최소화할 수 있으므로 개개정당의 득표수에 가장 충실하게 의회 의석을 배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아직 정치적 기반이 약한 진보정당들의 성장과 이들의 의회진출을 도와 우리나라의 정치마당을 보다 동태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될 것이다. 이미 산업사회의 문턱을 넘어선 이 땅에 아직 제구실하는 제도권 혁신정당 하나 없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정상적이 아니다.
그러나 현행 선거제도하에서는 돈과 조직력 모두에서 뒤지는 진보 정당들이 제대로 의회 의석 하나 차지할 수 있을지 실로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혁신세력들이 제도권 밖에서 방황하며 척박한 현실 정치상황에 대한 역반응으로 급진적 성향을 심화했던 것도 실은 이러한 제도적 미비와 무관하지 않다.
비례대표제는 비단 진보적 정치세력뿐만 아니라 각종의 직능대표와 여성계 인사 등을 정계로 불러들임으로써 오늘의 다원적·복합적 산업사회의 다양한 기능과 이익이 고르게 대표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 적정비율의 소선거구제로 지역대표성이 보장되고,더욱이 이제 지방자치의 제도화로 지역주민의 욕구와 바람이 대의정치과정에 여과없이 투입되게 된 마당에 현대 사회의 직능성을 정치세계에 바르게 반영한다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위에서 비례대표제의 도입이 가져다줄 몇 가지 특징을 열거했다. 그러나 으레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비례대표제 역시 진선진미한 제도가 아니며,또 운영여하에 따라 굴절·왜곡되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적 상황과 연관하여 가장 우려되는 것은,정당이 유능한 전문직능대표를 후보로 추천하지 않고 야당의 전국구 후보명단에서처럼 그 자리를 돈 받고 파는 경우이다. 흔히 이런 일은 야당의 정치자금부족을 이유로 정당화되기가 일쑤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비례대표제가 금권정치의 폐해만 확산시키게 된다. 따라서 비례대표제의 제도화에 앞서 우리가 면밀하게 강구해야 할 것은 공정하고 공개적인 정치자금의 공적관리체제를 수립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밖에 비례대표제의 후보명단 작성과 연관하여 정당의 중앙집권화·관료화 등이 조장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경우가 그랬듯이 비례대표제는 자칫 과다한 정당분립을 조장하여 정치적 불안정의 불씨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득표율이 일정수준을 넘지 못하는 정당에서 의석배분을 하지 않는 이른바 「봉쇄조항」 등을 통하여 적절히 봉쇄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다. 물론 이러한 조항이 진보정당의 탄압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밖에 소선거구,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를 어떻게 적절히 배분하느냐,또 후보명단 작성과 유권자가 얼마나 관여하느냐 등의 문제는 비례대표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이처럼 적지 않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요즘처럼 도덕정치의 열망이 불꽃처럼 치솟고,정당이 정책정당으로의 변신과 정치판의 물갈이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에서,비례대표제는 적어도 우리가 한국 정치질서의 쇄신을 위하여 진지하게 연구해보아야 할 제도적 장치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제 비례대표제의 쟁점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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