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교의 산에 올라 보라,그러면 서울의 겨울하늘이 어떤가를 금방 안다. 눈이 흩뿌리지 않아도 어둡고 뿌옇다. 서울하늘 아래에선 투명한 청자빛을 볼 수가 없게 되었나보다. 서울사람들은 보고 못 본 체,알고 모른 체 하고 사는 게 마음은 편할 수 있을 것이다.이렇게 지내다 보니 산성비가 쏟아졌다고 해야 찔끔하고,시민의 식수원이 2급수나 3급수가 되었다한들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다. 그러나 썩은 것을 숨기고 사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 한계가 곧 자정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떠내려가면 회생의 가망은 멀어간다.
오염의 단계를 환경연구가들은 정화능력을 기준으로 가른다. 더러운 물을 냇물에 흘려보냈다고 하자. 양이나 독성이 적은 구정물쯤은 냇물 스스로의 힘으로 깨끗하게 걸러낸다.
그러나 오수가 불어나면 사태는 달라진다. 오수가 정화능력을 가진 세균을 죽여버리고 드디어 냇물 자체가 정화력을 잃고 만다. 따라서 생태계가 무너진다. 이와 같이 저항할 수 없는 종류의 오염을 어떤 환경학자는 「초오염」이라 부른다. 이 상태에 이르면 환경문제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든다. 살아남기 위해서 보고 못 본 체 알고 모른 체 할 수가 없게 된다.
어찌 환경뿐이겠는가. 부정 부패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오염의 강도는 뻔히 알고 있으면서 되도록 침묵으로 봉인되어왔다. 요즘 의원들의 뇌물외유나 교수에 의한 입시부정은 까놓고 보면 원인과 맥을 같이한다. 거침없이 흐르는 탁류가 흘러 넘친 다음에야 분노에 떨고 큰 일이 갑자기 난 듯 세상을 뒤흔들 뿐이다.
망각에 묻힌 비리를 떠올려 본다. 교통단속 경찰관들의 구조화된 「손벌림」이 TV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잡혔을 때도 그러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덕과 질서의 문란에 새삼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눈가림 대책을 서둘렀다. 함정단속은 안 한다,부적격자는 인사조치하고 기강쇄신을 하겠다고 큰소리만 떵떵 쳤으나,그 뒤가 어떻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가 아닌가.
뇌물외유와 입시부정이 전철을 따르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높아간다. 환경오염의 단계를 자정에 두고 있듯이,비리의 척결이나 근절은 결국 정화능력에 달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정을 촉구하는 소리는 공명이 크다. 그럼에도 자정능력의 자발적 발휘의 낌새는 약하기만 하다. 비리의 확산 만큼 두려운 무력증이다.
국회는 입이 있다고 딴전을 피우는 형세이다. 대학은 어떤가,유구무언이듯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비리의 대응이 환경문제의 그것과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신통하기만 하다.
대응형태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일이 터져야 당장 칼을 뽑을 것처럼 설치다가 슬슬 「우유부단」으로 선회한다. 그 다음에 「망각의 심리」가 번져가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되어서 잘못과 부정은 흐지부지로 끝난다.
입시부정만 해도 그렇다. 대학에서의 자성과 참회의 신음은 미미하고,개선책을 내놓는 쪽은 또 교육부인 것이 딱한 일이다. 실기평가의 공정을 강화하는 네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여론을 살피기에 바쁘다.
그러나 제도를 아무리 떡주무르듯 해야 그것이 궁극적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 제도 탓으로 원인을 전가하는 관행도 청산의 대상이다.
그래도 기대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자정능력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마침 대학이 입을 열었다. 서울대학교는 예체능계 실기평가의 자율관리를 내년부터라도 실시하겠다고 교육부에 건의했다. 덧붙여 정부가 특정방안을 더 이상 대학에 강요하지 말라는 의견을 밝혔다.
전국대학 총학장들도 뜻을 모아 학생선발권을 대학에 되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이들은 「자체정화를 위한 결의」를 발표,학사운영 비리의 척결과 자율규제를 강화하는 대학의 독자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대학의 자율선언 가운데 눈길을 붙잡는 대목은 입시개선의 지엽적 방안이 아니라,자정 자활 책임을 각성하고 대학과 대학인의 자세를 독립적으로 정립하려는 의지 표명이다. 대학이 대학다우려면 오염 침투에 저항하는 자기방어만이 아니라,나아가서 정화의 세균을 키우고 번져가게 하는 자율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대학은 「눌림」에 얽매여 자활력을 잃었다. 제도에서 학사운영 인사에까지 자기 목소리를 좀체 내지 못했다. 애써 얻은 자율의 파편마저 반납하는 인상을 풍긴 게 대학의 현실이다. 그러니 책임감의 상실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대학을 대학에 돌려 달라는 당당한 요구는 자정과 자활의 결의가 담겨 있다고 본다. 남에게 기대고 남을 탓하고 책임을 돌리는 버릇은 자기상실로 이어진다.
대학만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 「초오염」에 대비한 자정의 기능을 회복하고 강화함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사회가 바로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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