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새벽 2시께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난데없이 10여 차례의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놀라 뛰어나간 경찰에 의해 종로경찰서 지하식당으로 연행된 타종수들은 허름한 옷차림의 어른 8명과 아이 6명이었다.추위와 허기에 지친 이들은 경찰이 제공한 국밥을 한 그릇씩 후딱 비우고 나서야 『충북 중원군에서 올라온 농촌이주 도시영세민』이라고 소개를 했다.
82∼84년에 『땅도 주고 집도 주고 생계비까지 지원해준다』는 정부의 말을 믿고 중원군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6가구 14명은 지난 10일 『더 이상 못 살겠다』며 근 10년 만에 재상경했다.
철거와 노점단속에 시달리다 동사무소 직원의 말을 믿고 「한많은 서울살이」를 청산한 뒤 중원으로 갔던 이들은 『남은 것은 빚과 한숨뿐』이라고 울먹였다. 이들 중 가장 3명은 농촌이주 후 이혼했고 장성한 자녀들이 가출해버리는 가정파탄까지 겪었다.
소를 입식하는 조건으로 2백만원씩 대부받아 소를 키웠으나 소값파동으로 쫄딱 망하고 이자가 이자를 낳아 집집마다 6백만원∼8백만원의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는 것이다.
빚 때문에 이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이들은 지난 10일 트럭에 짐보따리를 싣고 야반도주하다시피 서울로 와 지하철역 구내에서 노숙하면서 서울시 등을 찾아다니며 생계비 마련과 보상을 호소했으나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어디에서도 속시원한 말을 듣지 못하자 지난 17일 제1한강교 다리 난간 위에 기어올라가 시위했던 이들은 답답한 속을 풀길 없어 보신각의 종을 치기에 이르렀다.
중원군 엄정면 목계리에 살았다는 유현상씨(45) 등은 경찰의 훈방조치로 나가면서 『정착에 실패한 것은 우리 잘못도 있겠지만 누구라도 나와 우리가 살아온 사연을 들어줬으면 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석삼 년에 한이레쯤 천치로 변해/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하는 신경림 시인의 시처럼 「목계장터」를 떠나 현대판 유민이 된 이들의 손엔 「신문고. 억울한 백성의 소리다」라고 적은 라면상자 피켓이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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