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는 정치」를 전쟁이라고 한다. 「피를 안 흘리는 전쟁」을 정치라고 한다. 손자나 클라우제비츠 같은 동서고금의 병략가들은 전쟁과 정치를 같은 걸로 봤다. 정치가 잘 안되고 궁해서 막히면 전쟁도 일어나고 혁명도 일어나고 하는 것이 역사의 일반적인 경험법칙이기도 하다. 전쟁은 말하자면 하급정치인 셈이다.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페만사태도 정치·외교적인 노력의 거듭된 실패가 초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은 의회가 부시대통령에게 전쟁대권을 승인해 줌으로써 전쟁을 하겠다는 국가적 결단을 내리고 말았지만 이런결단이 있기 직전까지 전쟁말고 다른 방법을 써보자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었다.아랍세계의 패권을 노리는 사담·후세인의 위험한 정치적 야심을 응징,좌절시키는데 방법이 전쟁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벽하게」할 수 있는 정치·외교적인 노력만 성공시킬 수 있었더라면 전쟁은 안해도 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상지상의 「군사」전략이라고 하지만 페만전쟁도 「성공적인」 경제봉쇄로 대신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페만전쟁이 현대판 십자군전쟁으로,회교국가대 기독교국가간의 종교전쟁으로 비화될지도 모르는 복잡한 양상을 보이면서 세계적인 불안을 야기시키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잇달아 전쟁이 선포되고 있다. 새해 벽두부터 대통령이 나서서 물가를 직접챙기면서 전국에 걸쳐 물가비상이 걸렸다.
범죄와의 전쟁에 이어 물가와의 전쟁이 선포된 셈이다. 물가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경제장관회의에서 「조사」 「구속」 「엄단」 등의 용어와 조치들이 남발되고 있으니까 경제행정은 아예 포기돼 버리고 비상사태를 선포해서 일전불사를 외치는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된 것은 범죄와 관련된 치안행정이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 궁하고 막혀서 피를 흘리게 되면 전쟁이 되듯이 물가에 관련된 경제행정이 막히고 궁해서 실패하게 되니까 물가와의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보나 경제적으로보나 또는 우리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나 어느모로 보든지 과도기에 있고 전환기에 있다. 이런 과도적 전환기일수록 안정이 필요하고 질서있는 변화가 요망된다. 정치안정·경제안정·사회안정이 국정의 제1지표가 돼야하고 특히 경제쪽에서 탄탄한 안정기반이 마련돼야 한다. 취임 10개월여 만에 성장에서 안정으로 안정에서 성장으로 또다시 성장에서 안정으로 수없이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경제팀이 우리가 처한 이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우리경제의 위상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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