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박사들 토론땐 “벙어리”/지명하면 판에 박은 주장/논리없고 발언 참견 예사/개인적 요구·불만표시엔 지나치게 “똑똑”어른들은 흔히 『요즘 아이들은 입만 살았다』고 걱정과 불만 섞인 말을 한다.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며 자기 주장과 감정을 서슴없이 나타낼 줄 안다고 대견해 하면서도 『아이들이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물건을 사달라거나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에는 의사태도가 명확하고 기민하지만 일정한 주제에 대한 견해를 나름대로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또렷하게 전달하는 일에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서투르다.
어른들은 논리적 의사전달은 자신들과 똑같이 서투르면서도 개인적인 요구표시에는 능숙한 아이들의 「되바라진 입」을 우려하고 있다.
서울사대부속국교 5학년 담임 이경희 교사(43)는 방학 전 수업시간에 「어머님 은혜」에 대해 자유발언을 시켰다가 『어머님 은혜는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다』는 식의 교과서 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 구체적 사례나 설명을 곁들이는 학생들이 없는 데 놀랐다고 한다.
이 교사는 또 어머니가 차조심하라면서 왜 그래야 하는지,교통규칙은 왜 지켜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아 답답하다는 학생들의 불만을 듣고 교사로서의 자신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됐다.
서울 K국교 김 모 교사(27·여)는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어린이회의 시간에 토론과정을 지켜볼 때마다 실망을 느끼고 있다. 김 교사는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듣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중도에서 남의 말을 끊고 자기 의견을 쏘아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의 S국교 이 모 교사(38)는 『핵가족화시대의 맞벌이부부는 물론 국교 담임조차 50명이 넘는 학생 중 하루 한 명과도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한다.
89년부터 교과과정이 바뀌어 읽기 중심이던 국어과목이 말하기 쓰기 짓기 교육에 같은 비중을 두도록 개편됐으나 지엽적 지식전달 위주의 학교교육에서 어린이들의 자기 표현력이 신장될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 Y속셈학원에서 국교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안정숙씨(28·여)는 어린이들이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배운 유행어로 농담만 일삼는 경향을 지적한다. 『뻥이야』 등의 유행어를 하루에도 수없이 하는 아이들은 신나게 떠들다가도 어떤 주제를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시켜보면 금세 꿀먹은 벙어리가 돼버린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T유치원 백 모 교사(26·여)는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은 땡칠이예요』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그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TV에서 보는 땡칠이가 좋았던 아이들은 좋아하는 선생님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그런 표현을 했던 것이다.
또 『네 팔뚝 굵다』 『거의 독무대』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 등은 요즘 국민학생들이 경쟁적으로 쓰는 말이며 유아원생까지도 『요따만한 별 저따만한 별』이라는 거친 말을 배우고 있다.
무분별한 TV의 언어폭력에 대책없이 노출된 채 어려서부터 동요·경어보다 CM송·은어를 익히는 어린이들의 그릇된 경험이 이들의 언어문화와 도덕적 판단력까지 마비시키는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독서나 어른들과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해 언어교육을 하기보다 웅변학원에 보내는 식으로 돈으로 어린이들에게 언어를 사주려 하는 실정이다.
서울YMCA에서 발표력교실을 지도하고 있는 편부범씨(44)는 『경제적 풍요로 어려움을 모르고 뭐든지 쉽게 생각하는 어린이들은 성격 자체가 인스턴트화,조리있는 말보다는 피상적 결론만으로 대화를 끌어나간다』고 말했다.
편씨는 「엄마 아빠께 바라는 것」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시켜보면 90% 이상이 『공부하기 싫으니 집에서 공부하라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즐거운 이야기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그런 말조차도 복사된 것처럼 구성과 전개가 똑같은 경우가 많다.
서울 관악국교 좌경옥 교사(33·여)는 『어린이에게 말할 기회를 최대한 주는 것이 정확한 표현력과 사고력을 기르는 데 가장 중요하다』며 『대화 도중 남의 말을 신중히 듣도록 하고 말할 때 반드시 근거를 제시하도록 해 스스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교대 김원경 교수(60)는 『핵가족화와 TV의 영향으로 정서와 상상력이 메말라 가면서 어린이들의 언어문화도 질식해 간다』며 『부모와의 친밀한 대화와 일기쓰기 등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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