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부차원 “일단락” 확인 애써/역조시정 구체안 없는 “말 잔치”가이후·도시키(해부준수) 일 총리의 방한은 중요 우방국 정상의 방문치고는 비교적 조용하게 치러졌다. 이는 1박2일이라는 짧은 일정 탓도 있었겠지만 아직도 앙금이 남아있는 우리 국민의 민족감정을 양국 정부가 모두 의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가이후 일 총리의 방한이 갖는 의미는 외양상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결코 단순한 것은 아니다. 정치·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에게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행사였으며 우리에게는 새로 열리는 아태시대에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나가야 하는가를 음미케 하는 상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한일정상회담은 한마디로 「과거사를 매듭짓고 미래의 협력관계를 다지는」 자리였다고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정부간에 과거사를 매듭지었다고 해서 국민간의 감정이 완전히 풀릴 리는 없겠으나 재일동포 법적 지위문제 합의 등 공식적으로는 이 문제가 일단락된 셈이다. 일본측은 특히 가이후 총리의 파고다공원 방문 등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감정차원의 매듭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일 양국,특히 일본이 이처럼 과거사를 서둘러 묻고 청소년 및 각 분야의 적극적 교류로 상징되는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강조하는 이유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무관치 않다.
일본은 현재의 국제질서 재편기에 있어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상에 만족지 않고 정치·군사 대국으로의 비약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들어 활발해진 외교활동과 자위대의 증강계획 등은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은 과거 미국의 위세에 눌려 국제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던 「비정상적」 상황에서 탈피,경제력에 걸맞는 발언권을 확보하려 움직이는 것이다. 이 같은 배경 아래 가이후 총리는 연초부터 우리나라를 비롯,활발한 정상외교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가이후 총리는 오는 13일부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등 아세안 각국을 순방하며 3월과 4월 각각 방일하는 부시 미 대통령 및 고르바초프 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가이후 총리는 특히 아세안 국가 방문기간중인 오는 19일께 태국에서 일본의 대아시아 정책에 관한 선언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아태지역에서의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 애쓰는 일본으로서는 「불행한 과거」의 앙금이 남아있는 한국과의 우호선린관계를 우선적으로 다질 필요를 느끼는 듯하다.
경제적으로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측도 아태시대에 있어 일본과의 협력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지난해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에 이은 가이후 총리의 이번 방한은 양측에 모두 상당한 성과를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국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래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다짐했음에도 불구,곳곳에서 서로 엇갈리는 입장을 나타낸 사실은 향후 한일 관계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우선 일북한 관계개선에 있어 양국의 입장은 유사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가이후 총리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이 제시한 5개 원칙을 염두에 두고 북한과의 교섭을 진행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측은 일본이 5원칙을 준수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나 일본측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염두에 두겠다』는 언급은 다중적 해석이 가능한 외교적 표현으로 파악된다.
일본은 2차 정상회담 후 발표된 「한일 우호협력 3원칙」의 협의과정에 있어서도 이처럼 북한을 의식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실무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둘째항 『아태지역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개방을 위한 공헌을 강화해 나간다』는 문구 가운데 「개방」을 포함시키는 문제를 놓고 우리측과 마지막 순간까지 씨름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역시 북한을 의식,「개방」이란 단어를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또 소련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한국과 이해가 엇갈리는 것으로 관측된다.
가이후 총리는 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한소 관계진전에 있어 일본과 충분한 협의를 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함으로써 오는 4월 고르바초프 소 대통령 방일시 논의될 북방 4개도서 문제해결에 한국이 협조해줄 것을 간접 희망했다.
무역역조 시정이나 산업과학기술 이전 등 양국간 중요 현안에 있어서도 일본은 『적극 노력하겠다』는 식의 약속을 되풀이 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는 않았다.
물론 이번 가이후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재일동포 법적 지위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재일동포 2세 이하에 대한 지문날인을 가족등록제로 대체하고 교사임용범위를 확대한 부분 등은 합리적인 진전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각서에 일본의 사과를 명문화하려던 우리측의 요구에 일본이 강하게 반발한 사실 등은 일본이 과연 진심으로 과거사를 뉘우치고 동반자적 관계를 이뤄나가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에 의심을 품게 한다. 법적인 차별철폐가 실질적인 차별해소로 이어지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느낌이다.
이에 반해 「과거사청산」을 빌미로 영화 등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양국은 실무접촉에서 한일 합작영화제작에 합의하고 이를 한국내에서 상영키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 청산과 미래 협력관계 구축이라는 성과에도 불구,이번 정상회담이 일본의 외교대국화에 우리가 들러리를 서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많은 관계자들의 시각이다.<정광철 기자>정광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