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트당 골수” 대 “부시의 분신”/철군시한 D5일세계의 이목이 9일 제네바로 쏠려 있다. 유엔이 설정한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철수시한을 불과 6일 남겨놓고 미국의 제임스·베이커 국무장관과 이라크의 타리크·아지즈 외무장관이 「전쟁과 평화의 담판」을 벌인 것이다. 양측이 배수의 진을 친 양 한 치의 양보의사도 없이 들어간 이 「담판」이 자칫 마지막 외교적 노력이 아니냐는 우려로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2차대전의 서곡이었던 히틀러와 체임벌린의 뮌헨회담에 비유되는 「제네바 담판」 후 짓는 양측 표정이 세계의 기류를 좌우하게 된다. 「화·전의 메시지」를 전해줄 베이커 국무장관과 아지즈 외무장관의 프로필을 살펴보자.<편집자 주>편집자>
◎막후협상 탁월한 솜씨/한때 비둘기파 분류… 강경론으로 선회/베이커
제임스·베이커 미 국무장관(61)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한 한 부시 대통령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부시가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막역한 친구관계를 유지해온 베이커는 백악관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뛰어난 화술과 냉정한 판단력으로 협상의 명수로 정평이 나 있다.
베이커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철수시한이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지즈 이라크 외무장관과 갖는 이번 회담이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유럽과 중동을 분주히 오가며 반이라크 동맹 구축에 외교 수완을 쏟아왔다.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막후협상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온 베이커는 이미 반이라크 연합국가들을 방문,이번 협상의 성격과 향후 전략에 대한 사전정지작업을 일단락짓고 이라크의 속셈과 계산을 읽어놓고 협상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텍사스 상류층 가문 출신인 베이커는 30년 미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동부 명문인 프린스턴대를 나온 수재로 오랜 변호사 생활을 통해 상당한 부도 축적했다.
부시가 70년 상원의원에 출마할 때 그와 첫 인연을 맺은 베이커는 그 후 레이건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본부장,백악관비서장 및 재무장관을 거쳐 부시 정권 출범 때 국무장관으로 전격발탁되었다.
베이커의 정치경력 중 가장 특이한 부분은 그가 60년 후반까지 민주당원이었으나 70년대 들어 공화당에 입당해 거물정치인으로 급성장했다는 것이다.
공화당원이 된 뒤에는 부시와 함께 당내 온건보수파를 대표해온 베이커의 대중연설 스타일은 형식적이고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국무장관 취임 이후에는 외교관으로서의 자질과 관록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는 페만사태 발생 직후 딕·체니 미 국방장관 및 콜린·파웰 미 합참의장 등 부시 정부내의 매파들을 설득,경제제재조치가 효과를 볼 때까지 여유를 갖자는 낙관적 견해를 피력해 한때 비둘기파로 분류되기도 했다.<장현규 기자>장현규>
◎“뛰어난 아랍선전가” 평/서방선 “서구풍 합리적 인물” 오인하기도/아지즈
타리크·아지즈 이라크 외무장관(54)은 이라크에서 가장 세련된 관리라는 평가를 받아온 인물이다.
뛰어난 유머감각과 유창한 영어실력,쿠바산 아바나 시오아르스 여송연을 즐기는 서구신사풍의 그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 한동안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계획에 반대,처형됐다는 소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서방측 기준에 의하면 「합리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방의 「기대감」을 「조롱」이라도 하듯 곧 공식무대에 등장한 그가 지난 5개월 동안 벌인 외교활동은 서방지도자들로 하여금 『아지즈,너마저도…』라는 「신음」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는 이란이라크전 당시 이라크측이 먼저 도발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오히려 이란이 「침략자」라는 인상을 갖게 할 정도로 대서방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서방외교관들은 그를 이라크의 국익을 위해 대서방 관계개선을 도모할 인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쿠웨이트 침공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반전,「뛰어난 아랍의 선전가이며 바트당의 골수분자」로까지 발전되었다.
36년 이라크 북부 모슬에서 태어난 그는 25명으로 구성된 이라크 각료 중 유일한 기독교도.
바그다드예술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인 50년대말 범아랍주의를 표방하는 바트당 지하조직에 입당,정치에 입문했다. 당기관지인 알타우라 편집인을 거쳐 74년 공보장관에 임명됐으며 83년 이란과의 전쟁 와중에서 외무장관에 임명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 출신이 아니어서 후세인의 심복그룹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바트당 집행위원회 ▲혁명평의회 ▲정부 등 이라크 3대 통치기구에 모두 소속된 소수 중의 한 사람일 정도로 후세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자신의 세 아들 중 막내아들의 이름을 사담으로 지을 정도로 그 역시 후세인 대통령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다.<유동희 기자>유동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