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대신 오락기·비디오에 열중/명작 전집은 장식용 전락/사고·창의력 줄고 감각적 겉멋만 늘어/읽는 책도 고작 폭력만화요즘 아이들은 거의가 읽고 쓰고 생각하기보다 보고 듣고 즐기려고 한다. 독서를 통해 폭넓은 간접경험을 얻고 사고력을 기르기보다는 어른들의 비뚤어진 삶의 겉멋을 더 빨리 배우고 있다.
해외연수를 준비중인 공무원 김 모씨(40·서울 강서구 화곡동)는 최근 영어공부를 하려고 VTR를 들여 놓았다가 후회하고 있다. 5학년,2학년인 남매가 아버지 대신 VTR에 매달려 저질 중국영화만 열심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이들이 학교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VTR 앞에만 앉아있거나 휴일에도 테이프를 빌려다 주지 않으면 토라져 우는 바람에 아내가 속상해 하자 하는 수 없이 30권짜리 어린이 동화전집을 사주고 책읽기를 권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책을 거들떠보지 않아 방만 더 좁아진 꼴이 돼 버렸다.
서울 강동구 M국교의 박 모 교사(36·여)에 의하면 요즘 아이들이 보는 책은 TV코미디프로그램의 대본을 단행본으로 낸 것이나 저질 일본만화가 주종이며 더러 눈에 띄는 동화책도 원전을 너무 훼손한 것이나 만화로 된 것 위주이다. 박 교사는 최근 아이들이 『안 읽으면 간첩』이라고 말할 만큼 유행하는 「드래곤볼」이라는 일본 공상과학만화를 보았다가 그 폭력성과 성적 자극을 부추기는 내용에 깜짝놀랐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어린이도서관 관장 박종양씨(54)는 해마다 어린이 열람객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말한다.
박 관장은 「일일독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웃 국민학교에 참가를 권유하고,학부모 대상의 교양강좌도 열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도서관을 찾도록 유도하고 있으나 부모들부터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효과가 미미하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가까이하도록 하기보다는 유치원 유아반에 들어가자마자 속셈 컴퓨터 피아노학원에 보내는 등 예능 기능교육에만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TV VTR 등 시각문화의 공세에 노출돼 있고 학원을 다니느라 늘 바쁜 아이들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 무리이다.
주부 이 모씨(35·서울 노원구 상계동)는 2학년인 아들(8)이 하도 졸라 컴퓨터를 사주었으나 온종일 전자오락에만 열중하는 것을 보고 컴퓨터시대의 문제점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씨는 오락에 매달리는 아들을 무턱대고 막을 수도 없어 자신이 가계부를 쓰는 시간에 아들에게 책을 읽도록 하거나 일기를 쓰도록 하고 있다. 이씨는 『컴퓨터시대라고 조기교육을 강조하고 있으나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컴퓨터가 아무 내용없는 놀이기구로만 인식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교육적 내용이 많은 책을 만들어 팔기에만 여념이 없는 상혼도 어린이들의 독서환경을 저해한다. 어린이들이 전반적으로 활자문화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보다 나은 읽을거리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린이 도서연구회(회장 조월례·37·여)가 지난해 전국 국교 3학년 이상 5백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책을 많이 팔려고 우스운 얘기를 다룬 책만 많이 내놓는다』고 항변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 너무 흥미위주이며 『서점에 위인전이나 창작동화는 없고 명랑소설만 많아서 싫다』는 불평도 했다. 이 조사에서는 TV연속극으로도 방영된 국내 창작동화 「몽실언니」가 인기도서 1위로 꼽혔고 「어린왕자」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등 수준있는 외국작품들이 그 다음이었다.
어린이도서 전문출판사인 (주)대교출판 편집장 이기창씨(3)는 『이제는 형편이 나아져 어린이들 스스로가 용돈으로 책을 사볼 여력이 있다』며 『따라서 부모들은 좋은 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작 「얄개전」을 읽거나 부모에게서 귀신이야기를 듣고 자란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사고력과 창의력을 계발할 수 있는 독서방향에 대한 안목과 판단력을 갖추지 못할 때 어린이들은 점점 책읽기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울 관악국교 좌경옥 교사(33·여)는 「어린이 철학캠프」 운용의 결과를 토대로 「생각할 줄 아는 어린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와의 친밀하고도 다양한 대화와 책을 통한 간접경험의 확대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부모들은 「잘 모르거나 성가시다」는 이유로,교사들은 「학습진도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독서를 통한 사고의 싹을 잘라버리고 감각적이고 참을성 없는 어린이를 만들고 있다.
늘 전자오락 자동인형 따위와 노는 어린이들은 자연히 내성적·폐쇄적 성격을 갖게 된다. 따라서 그 나이에 맞는 책을 잘 골라 지속적으로 읽는 습관을 들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하종오 기자>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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