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철폐 시기단축등 기대/세부사항 이견… 정상 정치타결 가능성/최근 교원·지방공무원 채용합의는 진일보/사회적 차별 극복·민족교육권 확보 난제가이후(해부준수) 일본총리의 선물보따리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새해 벽두의 한일정상회담을 기다리는 많은 한국인들과 재일한국인들은 9일 한국을 찾아가 노태우 대통령과 2차례 정상회담을 가질 가이후 총리의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매우 궁금해 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91년 문제」로 불려온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및 처우개선 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협의시한인 91년 1월16일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기 때문이다.
2년여 동안 끌어온 91년 문제의 실무레벨 협의가 아직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어서 양국 정상회담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인 타결이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것이다.
지난 5일 서울에서 열린 최후의 실무국장회의에서는 ▲재일한국인 1·2세의 지문제도를 철폐하고 ▲국·공립 초·중·고교 교원채용 및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채용의 문호를 넓힌다는 데 대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지문제도 철폐시기 및 교원·공무원 채용확대 범위의 세부사항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 8일 마지막 절충회의를 갖기로 했다.
91년 문제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재일한국인 「협정3세」의 법적지위 근거를 마련해 달라는 재일 한국인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1,2세들에게는 일본정부가 영주를 허가했지만 3세의 영주허가는 「91년 1월16일까지 협의해서 결정한다」는 단서가 들어 있을 뿐 명문화된 법적지위가 보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제기의 동기였을 뿐 실제로는 70만 전체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를 대폭 개선하려는 인권운동으로 변질,양국간에 가장 민감한 현안으로 발전했었다.
▷협상결과◁
협정3세에게 일본 영주허가를 인정하라는 요구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본측은 즉각 영주허가를 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었다.
시간을 끌대로 끌다가 지난해 5월 노태우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촉박해서야 양국 외무장관회담에서 협정3세에게도 영주를 허용하며 3세부터는 지문제도를 철폐하겠다는 공식태도를 표명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한국측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면 그 다음 문제,즉 1·2세 법적지위 개선문제로 회담의제가 넘어가게 되므로 되도록이면 오래 끌고 가려는 일본측 협상작전 때문이었다.
3세 영주허가를 관철하고 난 뒤 한국측은 협상의 본 의제나 다름없는 1·2세 법적지위 및 처우개선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핵심은 1·2세에게도 지문찍기를 철폐하라는 것이었고,처우개선 면에서는 초중고교 교원 및 지방공무원 채용문호를 개방하라는 것이었다.
재일한국인의 역사적 경위는 인정하지만 한국인들에게만 폐지하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므로 철폐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측의 판에 박은 듯한 논리였다.
그러나 한국측의 강경자세와 조직적인 지문찍기 거부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재일 한국인 사회의 압력에 부딪친 일본은 이것도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굳히지 않을 수 없었다.
▷평가 및 과제◁
지문철폐 시기를 둘러싼 줄다리기에서 최소한 3,4년은 걸린다던 일본은 이번 실무회담에서 2년안을 제안했다. 가이후 총리의 결심에 따라서는 더욱 단축될 가능성도 없지 않고,준비기간중의 지문찍기 유예문제도 절망적인 것은 아니어서 기대해 볼만 하다는 관측도 있는 것 같다.
교원 및 공무원 채용문제는 국가의 공적인 의사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직종에의 확대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큰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그런대로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타결됐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법적인 차별보다는 사회관습적인 차별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고,무엇보다 민족교육권을 따내는 것은 이제부터의 과제이다. 1억2천만명의 일본 사회에서 70만명의 소수민족으로서 자존심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문제는 2·3세 중심으로 이행된 재일한국인 사회의 화급한 숙제로 남게 됐다.<동경=문창재 특파원>동경=문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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