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생각보다 심각 반영/「KAL기 정리」 한걸음 더 접근/소 관리 북한경사 시정… 중재등 남북관계 긍정 영향로가초프 소 외무차관의 방한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친서에서 나타났듯 조속한 경제협력 요청에 비중이 두어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사파견의 전격성에서 이미 예고된 대로 이번 로가초프 차관의 방한은 소련측의 급박한 속사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외신들도 앞다퉈 보도했지만 소련의 힘든 「겨울나기」가 생각보다 심각함을 이번 특사파견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자국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는 내용을 좀처럼 문서로 명시하지 않는 외교관행에 비추어 볼 때 친서내용은 소련의 속사정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점을 말해 준다.
로가초프 차관의 방한이 이처럼 소련측의 필요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특사로서의 노태우 대통령 면담과 제1차 한소정책협의회 개최 등은 한소 양국관계 및 남북관계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정책협의회 개최가 단순히 경제협력 요청을 위한 「모양갖추기」라 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친서에도 『양국 관계발전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가초프 차관 일행의 이번 방한에서 양국간에는 경제협력문제 못지않게 정부 분야에서도 의미있는 대화가 오갔을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7일의 정책협의회에서 우리측은 KAL기 피격사건을 본격 거론,소련측으로부터 ▲진상의 계속적인 조사와 ▲새로운 정보나 자료가 있을 경우 이를 한국측에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양국간의 실질적인 과거사 정리에 한걸음 다가섰다.
이날 우리측은 이즈베스티야지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가 보도한 KAL기 잔해수거 및 탑승객 사체소각 기사의 사실여부 확인을 요청하고 『우리 국민은 아직 이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과거의 상처를 분명치 않게 덮어두는 것보다는 짚고 넘어가는 것이 양국관계에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KAL기 사건이 소련측의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완전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측은 이에 대해 양국 국민이 냉전시대의 사건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보인 뒤 우리측의 문제제기에 대해 『언론보도에 기초해 이런 원칙적 문제를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다소 불쾌감을 표시해 한편으로 이 문제는 여전히 양국간 갈등의 불씨로 남아 있다.
정책협의회에서는 우리의 통일정책을 설명하는 외에 유엔가입 및 남북정상회담 등에 대한 소련의 협조문제도 함께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측은 이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안정이 동북아 전체의 평화유지에 긴요함을 설명하고 이를 위한 소련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측도 동북아평화라는 대전제 실현을 위한 한반도평화의 필요성에 동감하면서 필요한 경우 남북 관계개선을 중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져 이번 협의가 향후 남북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소련측 인사들은 그 동안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지난해 3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 개최 사실을 강조하며 이 회담의 개최에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간접 시사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현단계에서 소련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가늠할 수는 없으나 남북 관계개선에 있어서 한소간의 이같은 교감은 최소한 남북화해의 분위기 성숙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평가된다.
양국은 특히 이번 협의에서 우리의 유엔가입 문제에 관해 심도있는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옥 외무장관은 이날 정책협의회에 앞서 로가초프 차관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해 양국관계의 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해 유엔가입에 있어서 소련의 협조를 간접 희망했다. 소련측도 정책협의회에서 우리의 동시가입방안에 지지를 표시했다.
남북관계에 대한 한소양국간의 이같은 조율과는 달리 뚜렷한 입장차이가 노정된 것도 사실이다. 소련측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비핵지대화 문제 등을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측은 이 주장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반대의사를 분명히했으나 소련측은 앞으로도 한반도문제의 중재를 명분으로 이같은 주장을 계속하면서 우리측의 부분양보를 요구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동북아지역 평화문제 논의에 있어서도 소련이 주장해온 집단안보체제를 놓고 양국간에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시기상조임을 들어 반대를 표시했지만 이 역시 계속 현안으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이번 로가초프 차관 일행의 방한이 9일로 예정된 가이후 일 총리의 방한과 3월께 성사될 한미정상회담,4월께로 추진중인 고르바초프 소 대통령의 한일 양국 방문 등을 상반기의 활발한 정상외교를 앞두고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동북아질서 재편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남북관계 등 정치·외교 분야에서 소련과의 협력강화는 분단상황의 우리에게 고무적인 여건변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수교와 정상회담에 뒤어어 곧바로 닥친 경협이라는 대가가 또 다른 의미에서 균형외교의 지혜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정광철 기자>정광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