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일전 신화적 승리로 조선강점 토대 마련/사후 곧바로 신사 세워 일인 정신적 지주로내년부터 일본의 국민학교 6학년 사회교과서에 「역사상의 인물」로 부활되는 도고·헤이하치로(동향평팔랑·사진)는 일본 국민에게는 민족적 긍지와 자신감을 일깨워준 영웅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1905년 5월 노일전쟁 당시 이른바 동해해전(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이라 부름)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퇴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제의 한국병합이 가능했던 역사적 경위로 보면 우리에게는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에 버금가는 침략의 선봉장인 셈이다.
2차대전 이전 일본의 국민학교 국어독본에는 사실 이상으로 영웅화된 도고의 얘기가 큰 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 후 군국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내용이란 이유로 삭제됐던 인물이 46년 만에 슬그머니 부활되는 것이다.
동경 시부야(삽곡)구에 있는 도고 신사는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다.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명치) 왕을 기리는 신사 이래 사후 곧바로 특정인을 제사하는 신사를 세운 것은 도고와 메이지를 따라 순사한 노기·마레스케(타희전)가 있을 뿐이다.
그 만큼 도고는 일본인들의 정신과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 함대를 무찌른 도고의 승리가 값진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동양민족이 서양인과 싸워 이긴 최초의 승리라고 해서 인도의 네루도 진정으로 기뻐했고 중국의 손문도 그랬다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네루는 얼마 후 『승리 직후의 성과는 소수의 침략적 제국주의그룹에 한 나라가 더해졌다는 의미밖에 없다. 그 쓰라린 고초를 처음 당한 나라는 조선이었다』고 비판했었다.
도고는 일본 근대화의 태동이 시작된 가고시마(녹아도)에서 1847년 심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난이 심하고 지기를 싫어했던 그는 16세 때 사쓰마(살마) 앞바다에 쳐들어온 영국 함대와의 전투에 참전한 경험을 갖고 있으며,메이지(명치)유신인 25세 때 11명의 사쓰마 청년들과 함께 영국에 유학,7년 후 일본이 처음 갖게 되는 새 군함을 타고 귀국한다.
곧바로 해군 중위가 된 그는 일찍부터 여러 군함 승선경험을 쌓아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해 일본 공사관이 피격당하자 수척의 군함을 이끌고 인천에 달려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일본과 청이 동시에 파병할 때 함장으로 승진한 그는 황해의 조선연안으로 진격,청나라 전함을 격침시킴으로써 용명을 떨쳤고,러시아의 남진을 제지한다는 구실로 일본이 도발한 노일전쟁에서 신화적인 승전을 거두었다. 이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그는 「동양의 넬슨」이란 평판을 받게 됐고 그의 전법은 「도고 턴」이란 유명한 작전방식으로 전사에 남게 됐다.
「도고 턴」이란 러시아 함대의 진로에 정면으로 일열횡대형으로 전함을 배치함으로써 30분 만에 승패를 결정지은 대담무쌍한 작전을 말한다.
이 짧은 전투에서 도고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측 전함 19척을 격침시키고 5척을 포획했으며 러시아 함대사령관 로제스트웬스키 제독 이하 6천1백여 명을 포로로 잡고 4천5백여 명을 수장시켰다.
이에 비해 일본 함대는 수뢰정 3척을 잃었을 뿐이며 인명피해는 전사 1백16명에 불과했다.
이같은 눈부신 전과는 사실이고,그에 힘입어 일본은 조선진출권과 만주에서의 이권을 거머쥐었지만 최근 일본학계에서는 도고가 너무 미화되었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일부 작가 언론인 학자들은 생전 저서 한 권 남기지 않은 도고를 1934년 그가 죽자마자 그의 충복들이 거의 신격화시키듯 미화했다는 연구결과를 저술과 작품에 언급하고 있다.<동경=문창재 특파원>동경=문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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