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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기적은…/정경희(아침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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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기적은…/정경희(아침조망)

입력
1991.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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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땅이 녹아『예언의 나팔소리! 오 바람이여/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 것인가?』 겨우 30년의 짧은 생애를 살고 간 19세기초 영국의 시인 셸리는 겨울의 찬바람이 봄을 알리는 예언의 나팔소리라 했다.

1백70여 년 전 셸리처럼 우리도 새해가 밝으면 으레 다가서는 봄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동녘 바람이 얼어붙은 땅을 풀고,숨었던 벌레가 비로소 떨치고 일어난다』는 것은 원래 동양의 정월이 음력으로 봄의 초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고기가 얼음 위로 올라오며,수달은 처음 잡은 물고기를 늘어놓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한다』고 읊는다(월령)

그 기적의 계절에 부처는 또한 「열반」의 기적을 이룩했다. 『봄에는 만물이 자라나고,화초와 나무를 심고,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강물이 불어나고 온갖 짐승들이 새끼를 치는 때…』­그때 부처는 열반에 든다고 「쌍으로 선 사라나무」 사이에서 마지막 설법을 했었다(열반경).

91년 새해 아침의 찬바람은 그러니까 얼어붙은 땅이 녹아 벌레가 기지개를 펴고,꽃피고 강물이 불어나 열반이 이루어지는 기적이 미구에 닥쳤음을 알리는 예언의 나팔소리임에 틀림없다.

찬 바람이 사람을 움츠리게 하는 정초에 오는 봄을 생각하는 것은 유난히 성급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한 해를 깡그리 묻어 버리고,새로 열린 한 해에 그만큼 큰 꿈과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바로 1년 전 이무렵 「3당통합」으로 어느 날 아침 세상이 바뀌면서부터 시작해서,치솟는 집값에 갈 곳 잃은 사람들이 자살하고,끔찍스런 범죄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깡패가 권세와 줄을 대는 어이없는 한 해를 영원히 청산하고 싶기 때문이다.

○복권뽑기식 정의

91년은 21세기를 준비하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의 초입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21세기는 아직은 안개 속에 가려진 미래에 지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87년 6월 이후 이 사회가 겪고 있는 격동 속의 방황이 지금 우리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6·29선언 4년째가 된다.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4년째 계속되고 있는 격동과 방황은 바로 그것이 「6·29체제」라고 할 만큼 됐다.

3년 동안 이 나라를 소용돌이로 몰아쳤던 노사분규는 기세가 누그러들었다. 그러나 노동의욕은 떨어지고,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입국」의 장래에 비관적인 위기의식이 커가고 있다.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어야 될 3당통합은 날치기 통과와 무더기 통과로 이어지고,권력과 폭력조직이 입김을 통하는 충격적인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는 강력범죄는 이 나라의 도덕과 법을 지탱하는 공공제도의 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자유와 민주를 열망했던 국민은 모두가 「내몫」을 향해 뛰는 이기주의의 노예가 돼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회적 평등은 「복권뽑기식 기회균등」과 혼동되고 있다.

의식주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해야 될 집은 몇십 대의 경쟁을 뚫고 당첨만 되면 횡재를 하고,땅 투기로 복을 따내기만 하면 아무런 제약없이 활개치는 세상이 됐다.

「복권뽑기식 정의」는 지금 이 나라의 모든 구성원을 병들게 하고 있다. 정직과 노력보다 뽑는 자가 장땡이 되는 부도덕한 풍조가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6·29체제」에 안주

세계는 지금 모든 면에서 엄청난 전환을 거듭하고 있다. 21세기는 앞으로의 일이 아니라,이미 우리 발밑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서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무너지고,첨단과학·기술은 인간의 존재양식을 변하게 만들고 있다. 이웃 일본은 이미 세계의 경제강국이 됐고,유럽공동체(EC)의 국경이 소멸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국제질서는 근본적인 변혁을 앞두고 있다. 우리의 공업화가 채 익기도 전에 미국은 시장개방의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지금 6·29체제에 안주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6·29체제는 「과거청산」의 합의 위에 조립된 체제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기득권」과 「새로운 몫」이 분명한 합의없이 3년여에 걸쳐 아우성을 쳐왔다. 정치권력이나 부를 가진 쪽과,그렇지 못한 쪽의 아우성이다. 또 전국민이 복권뽑기식 기회균등을 평등과 정의로 착각한 채 뛰고,그 결과는 경쟁력 상실로 나타나고 있다.

역사는 쉬지 않고 전진하고,또 전진해야 한다. 새로운 국민적 합의로 6·29체제는 발전하고 또 청산돼야 한다. 이 사회가 복권뽑기식 정의를 벗어나,보다 정의롭고 성숙한 사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또 한 번 허리띠를 졸라 매자』고 떳떳이 말해야 한다.

불과 한 세대에 가난한 농업사회에서 맨주먹으로 공업을 일으킨 지난날의 업적을 기적이라고 말하고 사람이 많다. 그것이 만약 기적이었다면,한국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계사의 전환점에서 뒷걸음칠 수는 없을 것이다. 91년에 희망을 거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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