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깊은 감회를 가지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긴 하지만 올해는 그 감회가 여느해보다 더 간절하다고 말해서 결코 과장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국제적으로는 동서간의 해빙무드가 틀을 잡고 동서독이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이제 지구상에 분단된 나라로는 유독 한국만이 남게 되었다. 북방외교가 결실을 맺어 오랜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소련과 수교를 하게 되고 멀지 않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도 기대해볼 수 있을 만큼 되었다. 아직 진전은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북한과의 접촉이 궤도를 잡았으며 우리의 부단한 노력과 성의가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남쪽의 차갑고 두터운 폐쇄의 벽도 허물어질 수 있으리라고 믿어보고 싶다.
90년을 마감하면 내일은 91년의 새해가 된다. 1백년을 매듭짓는 20세기 마지막 10년의 첫 해이며 21세기를 준비해야 할 시작의 해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10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 될 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변혁의 10년이 될 것이요,역사의 큰 전환점을 이룩할 분기의 10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같은 중차대한 시기의 첫 시발년이 될 91년은 대내적으로도 민주주의의 기틀을 굳히고 새로운 역사,새로운 국가,새로운 사회를 구축해나가야 할 첫 걸음의 해가 되어야 하겠다.
돌이켜 지난 1년간의 우리네 발자취를 살펴볼 때 뿌듯한 성취감이나 자부심보다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이 더 많은 해였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는 비정상의 연속이었으며 철저하게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었다. 정치의 파행은 사회 모든 분야의 정상적인 운용을 저해해왔으며 많은 국민들에게 배신감과 허탈감을 안겨다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도 후반기에 수 차례에 걸쳐 행하여진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더라도 정치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깊어져서 70% 이상의 국민이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정치인에 대한 혐오도는 단순한 불신이라기보다 경멸의 대상으로까지 치부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권위주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5공시절에도 정치에 대한 불신도는 이렇게까지 자심하지 않았는데 그나마 민주화를 지향한다고 표방한 6공의 정치가 이렇게 국민의 외면을 받게된 데 대해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국민 모두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을 줄로 안다. 5공시절의 그 극심했던 비리와 부패에 대한 증오보다도 6공이 벌이고 있는 무질서와 무능 무정견 무성의에 대한 비판이 더 가혹할 수 있음을 우리는 민심의 향방을 통해 잘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6공이 지난 2년여 동안 5공청산 문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을 때만 해도 국민들은 오늘과 같이 정치를 탓하거나 불신하진 않았다. 변칙적인 3당통합이 이루어지고 그 충격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국민은 정치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거는 듯이 보였다. 5공청산이 끝나고 강력한 여당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면 그 새 정체되어 있던 민주화도 제대로 진척되고 엉망이 된 치안과 어려워진 민생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로 12개월 전 90년의 새해를 맞으면서 많은 국민들은 올해야말로 민주화가 정착되는 해이며,모든 것이 제 갈 곳을 찾아 제자리에 정돈되는 질서회복의 해가 될 것이라고 희망과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과 기대는 불과 몇 달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권력장악을 위한 당내분이 표면화되고 민주화와 민생치안은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통합의 원목적이 당초 표방했던 그럴싸한 명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회는 국회대로 국민의 빈축을 사기에 알맞는 짓만 골라서 했다. 일 년 열두 달 놀거나 쉬지 않으면 싸움의 연속이요 법안의 변칙통과요 자신들의 세비올리기에 외유바람이나 피우는 국회로 전락하였다. 의원들의 질에 대해서도 국민 모두가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들 만큼 형편없는 정치행각과 자세를 지속해왔다. 민자당이 다수의 힘을 과시했던 7·14날치기법안통과 파동으로 여야 관계는 다시 5공 때의 극한적 대결상황으로 회귀했으며 이러한 대결 정치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야당은 대여 투쟁의 방법에서 국민들의 납득이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산뜻하지 못했으며 더욱이나 야권통합의 실패는 야당을 국민의 눈밖에 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민을 위한 야권통합에 보다 자신들 스스로의 권력욕을 앞세워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권력을 위해서는 여나 야가 다같이 추하다는 인식을 국민들 뇌리에 심어준 결과가 바로 정치불신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정치불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부정,정치부재를 확인하는 선에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
정치 못지않게 경제도 굴곡이 심하고 시행착오가 많았던 한 해였다. 9%가 넘는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그 내용은 별로 탐탁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제조업과 수출 대신 건설부문의 이상성장과 서비스산업의 신장,소비지출의 급증 등으로 달성한 9% 성장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정상적 성장덕택으로 일부 제한된 산업부문의 인력난·자재난이 초래되고 그 부문의 자재값 및 임금급상승으로 물가불안이 부추겨졌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토지투기의 성행으로 부동산 값이 마구 뛰어올랐으며 불로소득층에 의한 과소비 풍조가 자심해졌다. 정부는 국민에게 공약한 금융실명제를 유보했고 종합토지세제와 재벌들의 부동산 매각방침을 형편없이 후퇴시킴으로써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과 되풀이되는 시행착오가 이같은 대정부 불신을 가속화시켰다. 실명제만 유보되면 금세 활성화될 것처럼 강조하던 증시도 결국은 27년 만에 최악이라는 폭락사태 속에서 폐장되었으니 정부가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면목은 없어지고만 셈이다.
황폐화된 우리 사회의 도덕성은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어디까지 타락해야 정신을 찾게 되려는지조차 막연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질서가 실종되고 인간성과 시민의식이 자취를 감춘 사회에 흉악범죄가 급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인신매매·가정파괴·납치·강도·살인 등 흉악범이 판을 치는 속에서 이제 90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지난 한 해의 모든 타기해야 하고 청산해야 할 비리와 비행,비정상적 관행과 부조리,이기주의와 무질서,불법 등을 우리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과거로 흘려보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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