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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밤바람/임철순 사회부차장(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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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밤바람/임철순 사회부차장(메아리)

입력
199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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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또 저물어간다. 90년이 종종걸음을 치는 세밑은 예년처럼 어수선하고 아쉽고 부산하기 때문에 오히려 쓸쓸하다.연말이면 누구나 바쁘다. 술꾼들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술을 마시기에 바쁘고 외상을 깔아놓은 사람들은 해를 넘기기 전에 수금을 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수첩을 바꾼 사람들은 인명록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옮겨적으면서 새해에도 관계를 계속 맺을 사람과 이제는 잊어버려도 좋은 사람들을 가려내고 있다.

청년기에는 1년이 길다. 아직 완결되거나 고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낯선 1년은 불확실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미지의 세월이다. 감상과 권태,불면따위는 젊음의 징표이자 특권일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1년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노인들은 이 세밑에 앞으로의 남은 세월을 손꼽아보고 있으며 정신없이 한해를 살아온 중년들은 일속에 묻혀 잊어버렸던 자신을 문득 돌아보고 갈수록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이 이제 더 이상은 어떻게도 달라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씁쓸해지다가 불혹이나 지천명 등의 이름으로 위장된 체념속에 어쩔 수 없이 또 빠지게 된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하는 인사에 『이 나이에 더 받을 복이 있겠수』하고 대답하던 사람의 심경이 이해된다.

모든 것이 침잠하고 얼어붙거나 감춰지는 계절에 동면을 해야 할 동물들은 벌써 제 자리를 찾아가 깊이 숨었다. 매일같이 먹고 배설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불편한 무리들만이 겨울의 시련에 내맡겨진채 여전히 부대끼고 있다.

공해와 지구의 온실효과,방한살이의 향상 등으로 요즘 겨울은 어린 시절의 겨울만큼은 춥지 않다. 그러나 겨울이 추운 것은 단순히 외기때문만이 아니며 내면의 빈 자리가 많은데서 느끼는 부족감 고적감 때문인 것 같다.

눈이 내려 흰 성탄이 되었던 25일 밤에는 모질고 엄혹한 바람이 몹시도 불었다. 무슨 원귀인 것처럼 음산한 휘파람소리를 내며 도시를 휩쓸던 칼바람은 아파트의 유리창을 마구 두드리고 흔들어대며 보채고 떼를 썼다. 그 바람은 「새해에는 다르게 살아라」,「너는 사는 법을 고쳐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추위를 탈세라 옷깃을 추스리고 나가 바람이 조금이라도 새어들어오지 못하도록 창문단속을 하다가 의미없을 몸놀림에 스스로 우스워지게 됐다. 그 바람은 겨울이면 언제든 불어왔던 바람이고 사람들이 잠든 한밤에도 얼어붙은 대지와 헐벗은 나무를 휩쓸고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이었다.

창문을 되레 열고 한동안 바람을 맞다가 다시 창을 밀쳐 닫고 들어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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