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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배신감」 분노… 차츰 “내탓”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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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배신감」 분노… 차츰 “내탓” 평정

입력
1990.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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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백담사 생활 2년 안팎/신도 상대 「5공 설법」 경내정치 펼쳐/간혹 측근과 대청봉 등반 고독 달래○…세 번째 겨울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백담사 유배생활이 마침내 초읽기 청산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88년 11월23일 상오 연희동 자택에서 『참담한 심경으로』 대국민 사과 및 은둔성명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 여사와 내설악의 말사로 칩거한 지 2년여.

당시 5공비리에 대한 들끓는 여론에 쫓겼던 전씨는 2∼3개월의 한시적 은둔을 생각하며 백담사로 떠났었다. 『국민이 주는 벌이라면 어떤 고행과 단죄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의 심판을 기다릴 것…』이라는 말을 남겼던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기간이 10배 이상을 유폐생활로 보낸 셈이다.

이 기간은 왜곡된 한 시대의 청산문제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느냐라는 교훈을 깨닫게 한 역설적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는 2년 이상의 유배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그의 하산이 시기상조라는 일부 여론도 있어 속죄와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는 그의 하산 후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씨의 은둔기간은 3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은둔 1년 만인 89년 11월23일 전씨 부부의 부처 진신사리 봉정식을 맞아 처음 산사생활과 심경을 반공개하기까지가 1단계. 이어 89년 12월31일 전직 대통령으로 헌정사상 처음 국회 증언을 하고 90년 6월 국회 5공·광주 양대 특위활동을 끝내 정치적·법적 5공청산을 매듭지은 것이 2단계로 볼 수 있으며 이후 하산시기를 두고 여권핵심부와 긴장관계를 계속해온 기간이 세 번째.

처음 은둔 1년 동안 전씨는 봉정식 인사에서 밝혔듯 6공 여권세력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이른바 「배신감」을 달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증언 등 5공청산 문제와 관련,6공의 진의를 크게 의심해왔는데 결국 그는 현 여권과의 긴장관계를 해소시키지 못한 채 국회 증언에 나서야 하는 국면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이런 시기별 분류와 별도로 은둔 6개월째부터 그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특유의 직선적 성격과 다변을 발휘,신도들을 상대로 백담사 경내정치를 본격화했다. 그는 재임시절 물가안정 및 치안상황 등 그의 치적을 열거하면서도 가끔 합당과 관련,『노 대통령이 5공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생각과 김영삼씨 김대중씨로부터 해방되려는 생각이 접합된 것』이라는 「정치분석」을 곁들이기도 했다.

최근 그는 자신을 보러온 신도들과 자유스럽게 사진촬영을 하는 등 하산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모든 게 내 탓이려니 합니다』 등의 말로 입산초 『몇몇은 꼭 손봐줘야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불덩이가 솟아올라 찬물을 마시며 이를 식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심경이 크게 순화됐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전씨의 백담사 행동반경은 국회 증언을 위해 서울에 다녀온 것 외엔 간간이 오세암·봉정암 등 암자로 등산하거나 「가신」들과 대청봉을 등반한 정도로 알려져 있다.

측근들은 은둔 초부터 하루 세 차례 예불을 드리고 백담사를 찾는 신도들을 상대로 재임시절의 회고담을 강연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고 말한다. 은둔기간 동안 그의 5공 설법을 들은 사람은 줄잡아 37만여 명에 이른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며 장세동·허문도·이양우씨 등을 통해 국내외 정세 보고를 정기적으로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이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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